세컨드
요즘 가끔 올라오는 글들 처럼 나 역시 세컨드 생활을 좀 했다.
굳이 내가 '바람의 상대' 보다는 '세컨드' 라는 단어를 택한건
그냥 그 기간이 워낙 길었기 때문일뿐이다.
그 사람은 내가 고3 졸업식도 마치지 않고 무작정 일하겠다고 뛰어든
스튜디오에 찾아온 고객님이셨다. 어쩌다 보니 꼭 다른 언니나 오빠들이
없을때 찾아오셨고 이것저것 설명을 하다가 공연취향이 비슷한 것을 발견;
공연을 보러다니다 보니 정이 들었고 나는 태어나서 남자를 처음 좋아해본
것인지라..;; 티가 많이 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처음엔 우리가 그렇게 진지한 관계가 될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재밌는 아저씨;;; 하나 알게 되었다는 느낌으로
만났었고, 여자친구가 있다는게 신경쓰였지만 나는 테레비를
너무 많이 봤기에 -_-; 내 매력으로 인해 2.3주면 그 여자가 떨어져
나갈 것이고 그녀는 틀림없이 나쁜 여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의 왠만한 드라마에서;;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을 만나기 전에 사귀던 여자는
대부분 좀 쫀쫀하고 못되게 나오지 않았던가)
2.3주면 떨어져 나갈 악역! 이라고 생각했던 여자는...우리가 만나던
4년동안 떨어져 나가주질 않았다.
그 사람이 정식으로 만나자고 하길래 나는 당연히 여자친구는
나의 매력으로-_-2.3주만에 떨어져 나간것이라고 굳게 믿었었다;
내 나이 20살. 대학입학 1달전. 젠장.
몇달이 지나서야 그 여자는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을 알았다.
완벽한 애정표현, 선물, 친절한 배려와 부모님과의 만남
모든 것들이 다른 여자친구가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하기엔
버거운 것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나 조차도 때때로 그 여자의 존재를 잊곤 했다.
그의 눈물겨운 노력의 산물이었겠지;
나는 사귀는 내내 한번도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 알려고 한적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정말 그랬다면 거짓말이고-_-
늘 궁금했고 한번쯤 보고 싶었지만... 그녀에 대해서 내가 한마디라도
꺼낸다면 그가 떠날것 같았고, 내가 뭔가 캐내기 시작한다면
내 스스로 떠나야 할것 같은 무서움에 나는 그가 그녀와의
관계를 제발 정리해주기를....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4년간 만났다.
조금만 더 버텨보고 말해야지 버텨보고 말해봐야지...
그 조금만 더..가 4년이 되고 만것이다.
우리가 끝난건 만난지 4년째 되던 어느날.
나는 단 한번도 그녀 존재를 캐지 않았었지만 그 여자가 나를 찾아냈다.
그녀는 스튜디오로 찾아왔고 새파랗게 어린게 이런 스튜디오속에서
놀고 있느냐는 경멸의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를 사랑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 되어 그녀 앞에서 손을 모아쥐고 사죄했다.
나는 그 순간 이건 내가 넘을 수 없는 장벽이라는걸 직감했다.
나보다 8살연상의 31살이라던 그 여자.
나는 그녀를 만나자마자 내가 대적할 수 없는-_- 카리스마를 느껴버렸다.
나같은건..정말 상대도 안되는구나.
애초에 시작하기 전에 이 사람을 한번이라도 봤었다면 나는 시작하지
않았을텐데......
정말 영화에서나 볼법한 그 코믹한 상황.
깨끗하고 단정한 생머리, 차려입은 정장. 성인여자의
트레이드마크인 하이힐에 가죽 백. 정말이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에 반해 나는 스튜디오에서 온 얼굴에 물감, 페인트, 기름을 묻히고
못쓰는 붓으로 머리를 틀어 올려 비녀대신 꽂고, 막노동 판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입을법한, 신을법한 옷과 신발을 걸치고 있었으니
그나마 위안은 내가 힐을 신은 그녀보다 내 키가 컸다는것 하나정도?
그 정신없는 와중에 그런걸 파악하고 뜯어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때 작업실 식구들은 아직도 가끔 놀리곤 한다.
그는 왜 그런 도도한 미인을 두고 나같은 애를 찾았을까.
그여자의 카리스마에 압도 되었던 그때. 내 나이 23살. 23살 12월
20살의 2월에 만났던 29살의 노련하고 세련된, 한눈에 반할만큼은 아니지만
내 눈에 참 잘생겼었던 남자.
20살의 내 눈에 그 남자는 신에 가까웠다. 너무나 현명하고
모르는게 없었다. 배려도 능숙했고 마음을 읽어내고, 그에 걸맞는 위로를
할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와 그렇게 끝난지도 벌써 몇년이나 지났다.
나이를 먹다보니 20살의 철없는 내가 보고 반했던 그의 모습은 그저
나이빨이었다는것.
그렇게 대단한것도 아니구나 하는것을 느낀다.
29살이라면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하는, 마치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
구구단이 교과과정에 있듯 29살의 행동 교본엔 그러한 멋진것들이
있었던것 뿐이었다.
오히려 이제 더 대단해 보이는건 같이 일했던 우리 식구들과
나를 찾아왔던...... 그 당시 31살이었던 그 여자.
'쟤가 애인있는 남자랑 4년이나 바람이 났었대.' 욕을 했을 수도 있었던
우리 스튜디오 언니들. 하지만 막내의 철없음을 이해해준건지
내 사랑을 인정해준건지 ...... 언니들은 첫사랑을 잃은 나의 고생이;;
짧게 끝날 수 있게 모든 배려를 해줬었다. 그중엔 틀림없이 나같은 불나방으로
마음고생한 언니도 있었는데..
그리고 나를 찾아왔던 그 여자. 오히려 욕이라도 한마디 하고...화라도
내고 갔더라면 오히려 내가 덜 초라했을텐데..완벽하게 내 완패라고 느끼게
만들었던 그 여자가 아직도 인상깊다.
우리 스튜디오도 이제 꽤 큰 규모의 ..나름대로 업계에서는 알아주는
스튜디오로 성장했다. 내 이름앞에 직함이 몇번이나 바뀌었음에도
그는 아직 우리 스튜디오의 고객이다. 이제는 그가 직접 찾아오진 않는다.
그의 부하직원이 그를 대신해 찾아온다. 물론 나도 이제 그때 그에게 차를 대접했던것처럼
차를 대접하지는 않는다. 스튜디오에 새로 들어온 대학졸업반인 귀여운 막내가 차를 준비하고
나는 작업복대신 깔끔한 옷을 차려입고 그 손님을 고객으로써 맞이한다.
그와 헤어지고 정말 죽을것 같았던 시간들이 기억난다.
이젠 꽤 나이가 들어버려...20대 초엔 누구나 다 그렇지. 라며 씁쓸하게
웃을 수 있지만 그 당시엔 세상에서 내가 가장 슬픈사랑을 하고 있따고;;;
내 첫사랑 이야기는 완전 영화 감이라며-_-혼자 병신같은 생각을
하곤 했다.
그 여자가 찾아온 후 나는 한달도 넘게 잠적해버렸고 남자는 나를
찾으려고 노력은 했으나 32살의 남자답게...최소한의 노력이 무엇인지
아주 깔끔하게 보여주었다.
조금은 더 열정적인 남자를 사랑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32살의 나이는 모든것을 너무 빠르게 받아들이고 빠르게 이해하고
빠르게 정리할 수 있는 나이었던것이다.
그 이후 2년반정도 마음아파하다 3년째되던해에 우리 스튜디오로 청첩장이
날아왔고 나는 아주 빠른 속도로 마음을 정리했다.
아픈 첫사랑때문인지 나는 남들보다 빠른 속도로 연애에서 우위를 점유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그 기술과 방법의 발전은 날로-_-달로;;; 발전해갔다.
하지만..... 아직도 가끔 아주 가끔 일을 하다, 혹은 출장을 갔다가 그를 마주친다.
그러면 그 날 밤엔 꼭 친구를 불러내어 미친듯이 술을 퍼마시는 독특한
버릇이 생겨버렸다.
첫사랑이란게 그런거다. 왜 하필이면 난 첫사랑이 세컨드 였을까..-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