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만한 글들

2011.10.12 10: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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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마다 베란다 물청소를 한다. 

그러고나면 다음날 아침엔, 뽀송하게 마른 베란다 바닥에

맨발로 잠옷을 입은채 털푸덕 앉아 베란다 밖을 내려다 볼 수 있어서다.

메밀차라든가 연한 커피라든가, 갓 끓인 뜨거운 보리차라도 한잔 들고 눈꼽도 안 떼고

햇볕 넉넉한 베란다 바닥에 아빠 다리 하고 앉아 주차장을 내려다보면

희한하게 근심 걱정이 사라지더라. 난.

저번 주에는 날이 좋아 그런가, 이 가난하고 추운 동네에도 나들이 가는 가족들이 꽤 보였다.

알록달록한 짐들이 차에 실리고 아이들은 제자리에서 방방거리며 뛰다가

엄마 잔소리에 그제서야 등짝을 맞고 차에 타고, 그렇게 붕-하고 출발.

그런 차들이 내가 본 것만 서너대는 됐으니,

그들의 목적지가 어딘지는 몰라도 기분은 얼마나 좋았을지 짐작도 됐다.

 

이 아파트에 처음 온 게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육개월째 접어든다.

올해 초, 집에 일이 생겨 얼마 되지도 않는 가족들도 뿔뿔이.

각자 일을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할 때에 나는,

그 당시 몸이 좀 안 좋았던 이유로

이 작고 낡은 아파트에라도 빌린 우리집, 이라고 머무를 수 있는 그나마의

혜택을 누리고자 입성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낯설고 볼품없는 아파트가 당분간의 '우리집' 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충격이더라.

 

내 처지가 비관되어 충격이 아니라,

변해버린 환경을 가지고 정신 못차리고 비관만 하며 힘들어하는 내 모습이 충격이었다.

물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

하지만 그 소중한 것에 대한 예의로라도 나는 이렇게 못나게 굴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는데

아무리 몸에 힘을 줘보고 마음을 고쳐먹으려 해도

이내 온 몸이 축 늘어지고 세상만사가 무섭고 겁이 났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이 무섭기만 한 내가 더 무서워지더라.

원룸이어야만 가능할 법한 평수에 콩알만한 방이 두개나 나있는 신비로운;; 이 아파트에서의 살림은

어쩔 수 없이 온전히 내 차지가 되었다.

방 밖으로 나가는 것도 두렵던 그 때의 나는

우리집, 이라고 있는 이 아파트에도 도무지 정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못되고 못난 마음으로 여기서 나는 새 일상을 살기 시작했고,

 

그렇게 반년이 지난 요즘의 나는,

이 아파트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딴 동네보다 좀 뭐랄까...

고즈넉하다 해야하나 평화로운 분위기라 해야하나.

나쁘게 말하면 좀 약간 늘어지는 느낌..

여하튼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그런 한가롭고 평화로운 기운이 나에게는 어쩌면 좋았던 것도 같다.

평수가 작아서 노인분들이 많은데 그래서 그런건가,

차량이 많지 않고 어린 애기들이 많아서 그런가,

어쨌든 좋구나...하고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오늘에야 문득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이 아파트가 반은 일반, 반은 임대라는 사실은 두어달쯤 전에 들은 적이 있다.

임대 아파트 시스템은 잘 모르지만

그래서 그런지 장애인들을 참 많이 봤었다.

아침에 단지 내 도로를 보면 차로로 오가는 전동휠체어 탄 분들이

그 아침에만 너댓분은 지나가시고,

엄마와 손을 잡고 활짝 웃으며 손들고 차 앞을 지나가면서 인사까지 해주는 다운증후군 청년이라든가,

복지사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부축하고 지나가는 시각장애인이라든가,

하여튼 장애인이 유독 많았다.

그런데 그거 알려나.

장애인들이 많은 아파트에 살다보니

뭔가 이 아파트에는 느림의 미학, 이랄까.

굉장히 느리지만 늘 정돈되어진 듯 반듯하고,

생기가 넘치지는 않지만 평화로운 그런 독특한 기운이 있더라.

나도 처음엔 몰랐는데 반년 내내 이 아파트의 이런 분위기의 정체는 뭘까...

늘 생각했었는데, 바로 이것인거 같다.

우리는, 그러니까 비장애인들은 

자신의 체력의 한계를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고 살기때문에

뭐든 급할 수 밖에 없다. 바쁜 세상이니까.

그런데 장애인들은, 자신의 체력이 허락하는 세상 안에서 더는 욕심내지 않고 움직이다 보니,

뭔가 정돈되어져있는 질서와 스스로를 지탱하고 남을 해치지 않으려는 평화랄까

그런 것들이 어우러진 독특한 분위기가 생긴건 아닐까 싶어졌다.

 

어쨌든,

엘레베이터에서 종종 마주치는 지체장애아인 우리 동 6층 꼬마 여자아이는

친하지도 않았던 나에게 한번 인사를 하기 위해서

얼굴의 수백개의 근육을 동원해야하는 수고를 마다않고 활짝 웃으며

"으아안니어엉하아아스에요오..." 를, 아파트 층수가 3층이 훌쩍 내려가도록 오랜 시간을 들여 정성껏 해준다.

그 인사를 받으면 뭔가...

종교는 없지만, 은혜를 받는 기분?

그런 것들이 느껴져 하루가 개운해진다.

 

가난한 이 동네의 주차장은 한낮에도 늘 차가 많다.

그렇지만 밤이 되어도 그 숫자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더라.

출퇴근을 차로 하지 않는 모양이다.

낡고 오래된 차나 작고 날렵한 경차들이 대부분인데,

그래서 크고 반짝이는 세단이 아파트 단지를 들어서는 날이면

돗자리 깔고 얘기 나누던 할머님들이나 마당 같은 주차장에서 노는 애들도

다들 멈추고 차가 주차를 하고 운전자가 내릴 때까지 뚫어져라 쳐다본다.

한가지 재밌는 것은,

이 아파트 단지 안에서는 클락션을 울리거나 바쁘게 움직이는 차들을 잘 보지 못했다.

처음엔 그 사실을 잘 몰랐었는데

아침 9시마다 아파트 내 차로 짧은 건널목을 왔다갔다 하는 50대 후반의 아저씨 한분이 계신다.

몸의 한쪽이 마비가 되신 듯이 왼팔을 접고 왼쪽 다리를 끌면서 걸으시는 분인데

꼭 바쁜 출근시간쯤만 되면 차로 건널목을 삼십분도 넘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고 계신다.

그러다보면 그 횡단보도 앞에 도착한 차들은 아저씨의 느리고 더딘 횡단이 끝날 때 까지

꼼짝없이 기다려야한다.

우리집 베란다에서 단지를 내려다보며 스스로도 모르는 새 오지라퍼가 되어버린 나는

결국 그 아저씨의 도통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에 대해

경비 아저씨께 여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전해 들은 경비 아저씨의 말씀은,

몇년전에 풍이 와서 재활치료를 받고 계셨는데

너무너무 열심히 하셔서 병원에서 일러준 것보다 훨씬 빨리 스스로 보조기구 없이 걷게 되셨는데

안타깝게도 차나 행인이 많은 건널목 같은 곳을 건너기만 하면

너무도 긴장을 하셔서 그런지 걸음걸이가 더 더뎌지고 꼬여서 난처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어서

민폐임을 아시면서도 '남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을법한 바쁜 출근시간의 건널목 지나기 훈련'을

하고 계신거라고 했다.

그리고 다행히, 정말 많이 좋아진거라고 했다.

또 덧붙이신 말씀은

여기 단지 사람들은 대부분 이 아저씨의 사연을 알고 있어서

이 아저씨 방식의 재활 훈련중인 아침 시간에는

운 나쁘게 건널목에서 아저씨와 마주쳐도 클락션을 울리는 법이 없으며

뿐만 아니라 어디서 마주칠지 모르는 휠체어와 지체장애아들에 익숙해있는 만큼

그다지 단지를 달리는 차량이 없다는 것이다.

이 아파트가 이렇게 느리고도 조용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니,

이만큼 사랑스러운 이유, 또 있을까. 헤.

 

세상 사람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상처를 받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골고루 잘 살 수는 없다는 걸 알고있다.

하지만,

장애인들도 자신들의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편히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된다면 참 좋겠다.

내가 지금 현재 가진 것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가 세금을 좀 더 내어서 유럽의 몇몇 나라들처럼

더 낮고 더 약한 사람들도 함께 웃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나라가 될 수만 있다면

나의 박봉의 월급으로 기꺼이 돕고도 싶어진다.

그게 엄한 데로 자꾸 들어가서 문제지만,

그 비극적인 핸디캡을 감안하고라도

성장보다는 복지를,

다수보다는 소수를 먼저 알아보고 챙기고 싶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그런 일상이 자연스러운 나라라면 참 좋겠다.

 

어쨌든 오늘 아침,

쓰레기를 버리러 나간 나에게

환하게 꾸벅 인사해 주던 다운증후군 청년의 미소는

반년전부터 오늘까지도, 또 앞으로 얼마간은 계속될

삐뚤어지고 단절된 내 후진 멘탈에 녹아들어

한줄기 햇살만큼 달콤하다.

머지않아 이 느리고 작은 아파트를 떠나게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대한민국에서 음식물 쓰레기통이 가장 깨끗하고

쓰레기봉투더미를 가장 이쁘게 오종모종 줄을 세워둔 이 아파트만큼

사랑스러운 아파트는 발견하지 못할 것만 같다.

장애인과 노인과 가난하고 고단한 이웃들이 임대한 이 보금자리처럼

변덕스럽고 성숙하지 못한 나는,

이 동네의 깊고 견고한 평화를

평생동안 임대하고 싶다.

 

 

omo.jpg

 

2011.10.12 10:34:01
1.   -_-
2011.10.12 10:40:46
2.   -_-
아 정말 좋다...
2011.10.12 10:44:28
3.   -_-
와... 볼글감이군요...

안그래도 지금 에블바리허ㄹ츠 듣고 있었는데...
2011.10.12 10:48:28
4.   -_-
아. 진짜 좋은 글입니다.
쑤시쑤시, 미끈덩 하는 글도 좋지만
사실 이런글 때문에 제가 무표정에 오는것 같습니다.
2011.10.12 10:50:34
5.   -_-
그간의 사람들과 차원이 다름을 느낄 수 있는 글이군요 (수정)
2011.10.12 10:51:46
6.   -_-
2011.10.12 10:51:55
7.   -_-
이런 댓글도 아쉬울 만큼 좋은 글이네요ㅜㅜ..
2011.10.12 11:01:07
8.   알김;
아 정말 잘 읽었습니다. 여유로운 삶을 산다는거..마음이 편안해지는게 정말 힘든법인데
뭉클하네요
2011.10.12 11:02:25
9.   -_-
아침에 베시시 웃게 되는 글이군요
잘 보고 갑니다
2011.10.12 11:06:21
10.   -_-
뭔가 따뜻하다.
2011.10.12 11:08:06
11.   -_-
글쓴 매우 잘 읽었슴다. 고마워요..
2011.10.12 11:09:58
12.   -_-
마음이 훈훈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2011.10.12 11:20:18
13.   -_-
정말 잘 읽었습니다. 여운이 많이 남네요 ^^
2011.10.12 11:35:57
14.   -_-
2011.10.12 12:05:07
15.   -_-
저런 곳에 살고 싶다 ㅠㅠ
2011.10.12 12:13:11
16.   -_-
풍오신분 왠지 울 삼촌이신것 같아...
2011.10.12 12:58:35
17.   -_-
아 울컥했어...그래도 난 지체장애인애들 싫어.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고쳐지지않는 거부감. 반성해도 나아지지가 않는다.글쓴이 멋져!
2011.10.12 14:33:36
18.   -_-
이래서 무표정을 10년 가까이 제집 드나들 듯 다니는 것 같다.
글쓴님 고맙습니다...
2011.10.12 14:52:31
19.   -_-
사실적인 표현이라도 어떤글과는 수준이 다른 글이군요.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10.12 16:09:27
20.   -_-
2011.10.12 16:47:47
21.   -_-
그림도 그리신건가요? 글처럼 따듯하고 귀엽네요 ...감동 받고 갑시다 ㅠㅠ
2011.10.12 16:48:48
22.   -_-
한동안 떡;관련 글들만 보다가.. 참 생각이 많게 하는 글이네요. 이런 글들이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무표정을 유지해온 근간이 된 것이 아닐까..
2011.10.12 17:01:28
23.   -_-
난 지방에 살다가 강남으로 이사왔는데 음식쓰레기통에 왜이렇게 개념없는 애들이 많은지.. 음식쓰레기를 비닐에 쌓인채로 넣는건 아니잖아?.. 정말 수준떨어진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음.. 글쓴 아파트 부럽네요..
2011.10.12 17:01:30
24.   -_-
난 지방에 살다가 강남으로 이사왔는데 음식쓰레기통에 왜이렇게 개념없는 애들이 많은지.. 음식쓰레기를 비닐에 쌓인채로 넣는건 아니잖아?.. 정말 수준떨어진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음.. 글쓴 아파트 부럽네요..
2011.10.12 19:30:00
25.   -_-
볼글로 가버렷......흙
2011.10.12 21:24:54
26.   -_-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림 좋네요.
2011.10.13 00:06:14
27.   -_-
정말로 아름다운 글은 기교가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온다는 걸 다시금 느꼈네요
2011.10.13 00:38:43
28.   -_-
아..진짜 이렇게 글을 잘 쓰신다고??!!

볼글로!!!
2011.10.13 00:50:54
29.   스뎅
이곳에서 10년 동안 본 글중에 가장 마음에 닿네~ 내일 아침수업 휴강이라 더 좋아 ㅋㅋ
2011.10.13 08:16:31
30.   -_-유부
그냥.. 울컥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좋네요..

읽는 사람까지도..

그 아파트를 살고 보게 만드는 글쓴의 솜씨에.. 감탄합니다.
2011.10.13 08:37:29
31.   -_-
이런 글은 널리 퍼트려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네요. 글쓴님! 다른 커뮤니티에도 올려주시길.....
2011.10.13 17:24:20
32.   -_-
저로 하여금 "하.. 씨발좋다"라는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셨군요;
2011.10.14 00:20:01
33.   -_-
아.......진짜..할 말을 잃었슴다. 개굳;
2011.10.14 11:28:01
34.   -_-
이거 꼭 퍼가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요? ㅠㅠ
2011.10.14 12:51:42
35.   -_-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힘든일 겪으셨나 본데 행복을 기원합니다.
2011.10.14 12:51:42
36.   -_-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힘든일 겪으셨나 본데 행복을 기원합니다.
2011.10.14 22:04:14
37.   -_-
송골매-모두다사랑하리 들으면서 읽는데 굳_-b
2011.10.18 01:43:03
38.   -_-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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