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한번, 화요일 4시마다 만나는 그가 나에게
평소답지 않게 굉장히 뜸을 들이며 "할 말이 있는데....휴우......저....근데...."
하고 곤혹스러워하였다.
뭔데, 뭔데? 하고 묻는데 얼굴이 발그레.
여태 봐왔던 무뚝뚝하고 쉬크한 그런 표정이 아니다.
이럴땐 다그치지 말고, 기다려줘야지. 그래야 다 터놓는 법이지, 하고
의자에 푸욱 기대어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근데 왠지 나에게 무슨 말을 꺼낼 건지 알것만 같았다.
두둥!!
"저.... 좋아하는 아이가 있는데요..."
이 남자, 내가 가르치는 13살 경상도 남아다.
나보다 한참한참 위인 어릴 때 동네 언니의 아이를 요즘 내가 가르치고 있다.
난 이 아이가 뱃 속에 있던 그 때부터 봐왔었다.
중간에 연락이 뜸해져있을 때엔 한동안 못 보기도 하다가
가끔 마주치면 기고 있고, 걷고 있고, 뛰고 있고, 그리고 날고 있었다.
휴학하고 고향에 내려와있는 동안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중간중간 방학때나 명절때 보면 내 앞에서 곧잘
<마리오> 라든가 <캐러비안의 해적> 이라든가 그런 걸 자랑스레 치곤 했는데
지난 봄부터 내가 맡은 후로 가르치는 나의 역량과는 상관없이
아이는 무섭게 실력이 늘었다.
음악이란 것이 사실 남자아이에게는 참 더디고 지루한 작업인데,
보통의 경우 남자아이들에게 있어 그 재미없어 하고 괴로워하는 피아노 실력이
미친듯이 상승 곡선을 치고 달리며 실력이 업되는 순간이
바로 사춘기때이다.
사나이의 무딘 감성에 뭔가 마음을, 혹은 몸을 자극하는 상대가 생기고
그러고나면 음악이 들려온다.
그리고 그때 자기 앞에 놓여진 악기가 있다면, 분명히 그것에 영향을 미친다.
나도 그동안 몰랐는데
이 아이가 이렇게나 일취월장, 하루하루가 다르게 피아노 실력이 무섭게 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어쩐지 부쩍 감미로운 것만 쳐대더니...
비로소,
첫 연애가 시작되었던 거다.
나는 흥분되기 시작했다.
흥분한 걸 감추어야만 더 많은 스토리를 빼낼 수 있으므로,
최대한 자제하며 무심한듯 "같은 반이야?" "걔도 알아? 니가 좋아하는거?"
따위의 구태의연한 질문을 했다.
의외로 순순히, 또 굉장히 자세히 연애사를 터놓더라.
봄에 전학 온 여자아이가 계속 신경이 쓰이면서 쳐다보게 됐는데
수학여행 가서 같은 방 남자친구들과 한 진실게임에서
그 아이에 대한 마음을 고백했고
그걸 들은 남자애 중 하나가 그 여자아이의 베프에게 말을 하는 바람에
그 아이는 물론 다른 아이들도 다 알아버리게 됐단다.
그러다가 2학기때 회장, 부회장을 나란히 맡게 되는 덕에
학급 일로 문자를 주고 받다가
여자아이가 먼저 이번 겨울방학 스키캠프에 너도 신청을 한다면 자기도 하겠다면서
같이 가서 재밌게 놀자고 했단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넌 생일이 언제야? 해서 여름이고 지났다, 하며 넌 언젠데?
하니 일주일 후라고 하길래
선물해줄까? 하니, <아니. 난 니 생일도 모르고 지나가버린데다가 파티도 안 할거거든. 근데 선물 받으면 미안하자너...>
라고 찍힌 문자를 아이가 보여주더라.
그러면서 묻는다.
"선물 달란 얘기지요?" 그래서 "응" 하니까 힘없이 네에...한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선물은 그렇다치고, 스키 함께 가자는건 왜 그런거 같아요?" 한다.
이럴 땐 뭐라해줘야지? 듣기 좋은 말, 아니 듣고 싶어하는 말, 해주고 싶었다.
"여자는 남자하고 달라서 남잔, 1/10만큼의 마음이 들면 1만큼의 얘기를 내뱉는데 대해 큰 부담을 안 느끼는데
여자는 9/10 가 되어도 1만큼의 얘기를 못 꺼낸다. 정말로 너랑 함께 스키를 가고싶다는 얘기야.
널 얼만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니가 진짜 좋아한다면 생일 선물, 주는 거 난 찬성이야" 라고 했다.
남자의 눈이 반짝, 한다.
입꼬리도 살짝, 올라가고.
그리고는 오늘 시간 되세요? 하며 자기는 여자 선물 아무리 생각해도 안 떠오르니
함께 골라줄 수 있느냔다.
허허........여자;;;;' 선물 이랬냐?
같이 버스를 네 정거장이나 타고 대형 서점의 팬시와 문구 악세사리 코너로 갔다.
열줄도 넘는 '여자'를 위한 아이템 가득한 진열대를 꼼꼼히, 지독히도 꼼꼼히 보던 아이는
더 깊은 한숨을 쉬면서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프다, 며 도저히 모르겠단다.
나도 쇼핑은 싫어해 ㅜㅜ
할 수 없이 적당한 아이템을 하나씩 들어서 이건 어때? 이건 어때? 식으로
후보를 압축시켜나가기로 했다.
이쁜 땡땡이 무늬 무려 4단 우산: 뭔가 어른들끼리의 선물 같아요. (초딩은 비도 안 맞냐? )
머리띠나 머리핀: 그 애는 어깨까지 오는 단발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아요. 저도 머리핀 꽂는 거 싫어하구요. (그래 니 취향...)
폭신폭신 하얀 곰인형: 이렇게 큰 건 무리예요. 엄마에게 들키고 싶지도 않구요. (부모 몰래 연애질인거냐?)
하트 가득 찍힌 손수건: 하트...로 부담 주고 싶지 않아요. (아 네.......-_- )
그래서 내가 봐도 탐날만큼의 분홍색과 오렌지색 투톤으로 된 가죽 필통을 골랐다.
가격은 14900원.
애가 당황한다. 얼마 가지고 왔냐고 물으니 만원이면 충분할줄 알았단다.
내가 돈을 보태주겠다고 하니 그건 싫단다. 여기까지 따라와주신것도 고마운데, 란다.
생각해보니 돈을 직접 내주면 왠지 의미도 없는거 같고 하여 궁리해보니
여기 서점의 적립 포인트, 만이천원쯤 된다는 걸 기억해냈다.
너 세뱃돈 받으면 나중에 문상으로 갚아~ 이러면서 포인트 결제를 해주었다.
그냥 준다는 걸, 팬시점에 파는 하트 없는 포장지를 골라
화장실 앞 긴 의자에 둘이 앉아서 이쁘게 포장을 했다.
편지는 안 쓰느냐고 물으니, 그렇게까지는 하고싶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선물을 고르고 사고 포장하고 나오니
어느 새 깜깜해져있었다.
엄마에게는 안 들킬 자신 있느냐고 하니까
일부러 좀 큰 후드 잠바를 입고 왔다면서 안에 넣고 지퍼 잠그면 된단다.
같이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애가 갑자기 말이 없어지면서
창밖만 하염없이 쳐다보더라.
무슨 생각해? 하니,
"난 여자 선물 처음 사보는데....기분이 정말 묘해요." 한다.
불편해? 찜찜해? 하니
방그레 웃으며 "아니요." 하더라.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사실 나는
연애에 참 소질이 없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건 참 쉬운데, 내 마음 주는 걸 아까워하던 고약한 시절도 있었고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데 완급 조절이 어려워 상대를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런 내가 한 남자의 연애 써포터가 되어 맹활약을 펼친 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음주에 오시면 선물 준 거 꼭 보고할게요!! 고맙습니다아!!!
90도 허리 굽혀 연신 쏟아내는 감사의 인사를 듣다니, 감개가 무량해졌다.
13살 남자의 연애는, 33살 남자의 연애보다 낭만적이다.
이 아이는 평소에 어떤 일에도 당황하거나 허둥대지 않는 성격이고,
옆으로 길게 처진 눈으로 활짝 웃을 때에도 입꼬리는 올라가지 않을만큼
표정 변화도 크지 않은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기분이 묘하단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프단다.
여자아이의 그렇고 그런 문자 한줄 한줄을 수능 영어 본문보다 심혈을 기울여
독해를 해내려다 실패하고
어른 여자에게 도움을 청해왔다.
처음, 이라는 것은 얼마나 스스로를 흥분하게 하고, 설레게 하고, 또 두렵게 할까.
도대체, 십대 남자의 첫 연애 감정이라는 것은
어떤 화학 반응에 의한 감정의 접점이란 말인가?!
몹시도 궁금하고, 몹시도 떨린다.
이 남자의 연애는 두 사람이 중학교가 갈리면서 끝이 날테지만,
올 12월 스키장에서 만큼은 새하얗고 뜨겁게 사랑을 불태우길, 진심으로 빈다.
그리고 봄이 오면, 첫사랑 따윈 장렬히 전사시키고
새로운 감정과 정서로 단련되어진 새로운 사랑을 또 만나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그렇게 여러번의 연애 감정을 거치고 거쳐
20년쯤 후에는
백번의 연애 후, 뒤도 안 돌아봐도 될 단 하나의 사랑만으로
남은 생을 살아갈 배짱으로 한 여자를 만나는
사랑스러운 남자로 커주길 바란다.
아.
그나저나.......
13살짜리들이 눈밭에서 러브스토리 찍고 있을때
나는 나가수 십;;;라운드나 보고 앉았어야 할 걸 생각하니,
괜찮다.....
괜찮다.....
괜찮냐....? 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