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만한 글들

2011.11.30 10:5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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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늘 호언장담했었다.

"나보고 담배 끊으란 말은 마라. 난 죽어도 담배때문에 죽진 않을거다.

이렇게 내가 사랑해주는데 얘가 날 배신할 리가 없거든."

과연, 그 말은 사실이었다.

재작년에 받으셨던 건강검진에서도 아빠의 폐와 간은 놀랍도록 건강했고

그리고 정말,

다른 연유로 돌아가셨으니.

 

어릴때부터 우리집은 노오오오랬다.

엄마의 고상한 안목으로 고르고 골라, 온 집안 가구를 이리저리 옮겨서 힘겹게 도배를 한 날이면

나는 신이 나서 이 방 저 방을 인부 아저씨들한테 폐 되는 줄도 모르고 뛰어다녔다.

하아얗게, 눈부시게 하아얗게 새단장을 하고 있는 벽들이 너무 이쁘고 고와서 설레었었다.

그러나 그것도 석달이면 끝이었다.

엄마한테 눈 흘김을 당하면서도 이리저리 온 집을 누비며 담배피는 아빠의 무식한 습관 덕에

우리집은 또다시 석달되어도 십년된 듯한 벽지로 거듭났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아빠 무릎에서 앉아 올려다 보는 아빠의 담배 연기는 경이로웠다.

지금에야 그저 흔한 도넛츠지만,

어린 시절, 나는 아빠가 왼쪽으로 도넛을 날리면 손을 파닥거리며 왼쪽 도넛츠 아래로 뛰어가고

오른쪽으로 도넛을 날리면 또 오른쪽으로 달려가 도넛츠 아래에서 파닥거리며 날개짓을 했다.

엄마는 소리를 꽥!!! 지르며 애 데리고 뭐하는 거냐고 아빠를 나무랬지만,

아빠는 "어..어....우리 요정놀이 하는거야...."

이라고 늘 변명하였으므로,

덕분에 나는,

서른 넘어 요정이 되신 박정현 언니와는 달리

그 어린 시절부터  '요정'의 신분으로 살 수 있었다.

담배의 요정.

 

하루에 두갑은 넘게 피는 아빠 덕에 나는 하루종일 수시로 요정이 되어 살았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 식구는 참으로 현대인의 마인드에 역행하는 무식한 집단이 아닐 수가 없는데,

그다지 날 방치하고 키우는 것과는 거리가 먼 엄마도 아빠의 흡연에 관해서는

왜 그렇게도 관대했는지, 그건 지금도 궁금하다.

그 영향인지, 나는 한참 자라난 지금에도

담배 연기에 대해 전혀 민감하지가 못하다.

담배 연기를 질색하는 내 친구 하나는 

남들이 내뿜는 담배연기의 찌든 냄새를 담배'향' 이라고 부르는 니 취향도 좋지만

간접흡연으로 서서히 병들어갈 니 폐에 대해 너무 아둔하게 구는 것 아니냐고 걱정스러운 힐난을 하기도 하지만,

딸을 담배의 요정, 으로 키우신 아빠를 둔  나도 역시나

담배때문에 죽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짐작으로 건강에 치명적인 우를 범하며 살고 있다.

 

고등학교를 멀리 다녀서,

비가 오는 날에는 아빠가 조금 이른 출근을 하시면서 학교까지 바래다 주셨다.

먼저 내려가 어김없이, 모닝 담배 한모금으로 신선한 아파트 단지 공기를 더럽;히시던 아빠는

내가 차 문을 열고 우산을 접어 타는 순간에 항상,

단 한번도 빠짐 없이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 를 틀어주셨다.

아빠는 이 영화를 너무너무 좋아하여서

결혼 전, 엄마에게 <내일을 향해 쏴라> 에서 처럼 당신을 내 자전거 앞에 태워주겠노라고 고집을 피워서

이 남자면 내가 믿지, 하며 앞에 탔다가

앞으로 꼬꾸라져 즉사;할 뻔 했다고 하셨다.

믿을만한 사람이었지만, 운동신경은 더럽게 없다는 걸 몰랐다고.

그런 처절한 사연이 있는 영화이니, 나도 어릴적부터 아빠 옆에서 수도 없이 봐왔고,

비 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틀어준 노래 덕분에

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비가 오는 날 새벽이면

내 귀엔 이 노래가 환청처럼 들리고,

이 노래가 들리면

아빠가 그립다.

 

어릴때,

마당에 소가 한마리 늘 매어져 있던 시골 작은 할아버지네 집에 다닌 적이 있다.

경북 경산 어디쯤에 있는 아주 오래된 시골집이었는데,

일년에 한번씩 가을 초입쯤이면 선산에 다니러 갔다가 작은 할아버지네 들러서

방에도 들어가지 않고 마당에 모여 일년치 안부를 주고 받곤 하였다.

아홉살, 열살때쯤이었던가..

그 날은 비가 추적추적 길게도 오래도 지루하게도 계속 내렸었는데

여자어른들은 다들 깊게 파여진 어두운 부엌에 들어가서 긴 수다를 떨고 계셨고,

마당을 바라보는 붉은 처마 밑에

작은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네 둘째 삼촌과 아빠와 내가 있었다.

셋 다 아무런 말씀도 안 하신채로 삽십여분을 잘도 견디셨다.

어린 나조차도 민망하던, 그 침묵을 깨고 내가 한마디를 꺼냈다.

"비가 오니까 안개낀 것처럼 풍경이 뽀얗다. 구름 위에 떠있는 것도 같아."

그랬더니 아빠가 너 말 잘 했다는 듯이 얼굴에 화색을 띄시며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무시고는

진짜 구름 만들어줄게, 라며 삼촌이 대어주는 라이터에 얼굴을 갖다대셨다.

그리고, 작은 할아버지도 삼촌도 말없이 다들 담배를 입에 무셨다.

잠시 후,

높은 툇마루 위의 세 남자가 정과 성과 열을 다하여 수직 아래로 뿜어내놓는 담배 연기는

마당 아래 자욱하게 내려앉기 시작했고

내리는 비에 눈에 보일만큼 연기도 쑤욱쑤욱 아래로 깔리기 시작했다.

실로, 그것은 구름이 맞았다.

비 한방울이 바짓단에 튀는 것도 끔찍히 싫어하던 나는

그 날만큼은 나도 모르게 젖은 마당으로 뛰쳐내려가 비를 맞으며

담배구름 사이로 날개짓 퍼덕이는 담배요정으로 빙의 되어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두고 돌아왔다.

 

사랑하는 사람이,

담배를 많이 핀다면

그건 많이 걱정스럽겠다.

하지만, 마음 깊이에 이렇게나 사랑스럽고 귀여우며 가슴 저릿하게 새겨져 버린 '담배'의 추억을

나는 어찌 하면 좋을까.

엄마는 내게,

아빠가 보고싶으면 참지 말고 울어보라고 했다.

엄마도 챙피해하지 않고 울며 충분히 슬퍼하고 있으니,

자꾸 웃지만 말고, 태연한 척 말고 차라리 울어보라 한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아빠를 떠올리면 함께 재생되는 동영상은

너무도 사랑스럽고 재미나고 즐거운 것들이 많다.

아직은 화질도 너무 좋아서,

쉽게 흐려질 것 같지도 않다.

현실보다 더 또렷한 추억은, 내가 우는 것도 쉬이 허락하지 않나보다.

이런 불효녀를 만들다니,

역시 못된 아빠다.

 

 

 

그렇지만,

하루만.

딱 하루만이라도 돌아와줘요.

우리에게로.

 

 

 

 

 

 

 낭만즉사.JPG

 

 

 

 

 

 

 

 

2011.11.30 11:10:43
1.   -_-
비오는 날 참 읽기 좋은 글이다
이것도 추정글이라고 할까봐 겁나지만;;
이분 글은 정말 입가에 미소짓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2011.11.30 11:22:31
2.   -_-
쥑이네;





미안 이런 댓글밖에 못달아서;
2011.11.30 11:30:05
3.   -_-
아.. 이분이 쓴 글들은 정말 가슴을 후벼파는군요;
2011.11.30 11:36:56
4.   -_-
2011.11.30 11:37:22
5.   -_-
2011.11.30 11:52:42
6.   -_-X-_-
잔잔하게 잘 읽으며 내려왔다가...

파일명 보고 빵 -_-;;
2011.11.30 12:05:19
7.   -_-
5번 와.....
2011.11.30 12:18:24
8.   -_-
정말 어떤 댓글이 이 글에 어울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첨부사진의 파일명은.......
2011.11.30 12:37:59
9.   -_-
엉엉 볼글로 엉엉
2011.11.30 13:06:38
10.   -_-
좋아용 ㅠㅠ
가슴에서 비가 내리고 운무가 깔리네요.

잔잔하고 향기로운 글... 볼글 추천~ ㅠㅠ
2011.11.30 13:59:32
11.   -_-
볼글 추천!! 글쓴! 이뻐야 해!! ㅋㅋㅋ
2011.11.30 16:00:51
12.   -_-
7년 전에 끊은 담배를 생각나게 만드는 글입니다
2011.11.30 16:12:04
13.   -_-
잉 ㅠㅠ

담배 끊은지 2년째 돼가는데...담배 땡긴다 ㅠㅠ
2011.11.30 16:19:35
14.   -_-
볼글 추천!! 글쓴! 이뻐야 해!! ㅋㅋㅋ(2) ㅎㅎ
2011.11.30 16:46:45
15.   -_-
2011.11.30 18:02:33
16.   -_-
엉엉...ㅠ
2011.11.30 21:15:00
17.   -_-
오랫만에 볼글로 ㅠ
2011.11.30 22:29:38
18.   -_-
저도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네요...
2011.11.30 22:44:12
19.   -_-
어릴 때 아빠가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무조건 뛰어가서 안기던 습관이 있었어요.
그럼 아빠는 저를 번쩍 안아올렸다가 내릴 때 한번 더 꼭 안아주셨는데,
몸도 생각도 무거워지기 시작하면서 그만 두게 된 것 같아요.
담배냄새를 지독하게 싫어하는데
어느 추운 날 저녁, 아빠의 품에서 나던
차가운 공기와 담배냄새가 섞인 씁쓰름한 냄새가 참 그리울 때가 있어요.
글쓴 글을 보니 더 그리워지네요.
2011.11.30 23:43:18
20.   -_-
나랑 한번 만나요.
2011.11.30 23:44:06
21.   20
비밀글 입니다.
2011.12.01 07:27:31
22.   -_-
엉엉 볼글로!

글쓴의 추억의 한 자락을 보여줘서 고마워!
2011.12.01 11:28:12
23.   빨간모자
아...정말 오랫만에 잼있게 읽었네요

닥치고 볼글!


아 그리고 경북 경산이 시골이라니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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