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마친 여고 교실에는 눈과 코에 반창고를 붙인 급우들이 가득했다.
이제 자유랍시고 엄마 손 잡고 동네 미용실에 가서
짧은 단발머리에다 힘겹게 웨이브를 우겨 넣은 우리들은
한 거푸집에서 찍은 것 마냥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때의 사진은 결혼할 때를 대비하여 불태웠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질때 가장 아름답다고 하지 않던가.
다행히 어릴 적 이사를 자주 했기에 앨범이 몇 개 분실되었다는 핑계를 댈 수 있다.
성시경이나 박해일처럼 생긴 선배를 만나서 연애를 하겠노라 꿈에 부풀었다.
대학교에 가보니 유리상자처럼 생긴 복학생만 가득하다고 했다.
차라리 유리상자라도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여대에 붙었다.
지금이야 명절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풀메이크업 장착한 나를 보며
할머니가 '참... 화장이란 좋은 것이여.'를 중얼거리실 정도로 스텟을 찍었지만
스무살의 나는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촌스러움이 덕지 덕지 붙어있었다.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을 신은 입학생 가운데서
부츠컷에 운동화를 신은 나는 기가 죽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다들 가방에서 파우더 팩트를 꺼내 얼굴에 두드렸다.
옷과 가방을 판다고 알고 있었던 샤넬에서 화장품이 나오는 건 처음 알았다.
나도 어디서 꿀리진 않어. (BGM - 하트브레이커)
동갑이지만 나보다 한참이나 어른스러워보이는 동기들을 보며
나도 화장이라는 것을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엄마는 나에게 화장을 가르쳐 줄 언니를 낳아주지 않았다.
엄마에게 물어보면 벌써부터 머리에 허영만 찼다고 혼낼 게 분명했다.
그래, 나에게는 네이버 지식인이 있잖아.
초보 메이크업으로 검색해보니
지마켓 상품 카테고리만큼이나 복잡한 색조 화장은 일단 빼놓고
기본적인 화장의 단계는 대충 이렇다고 한다.
기초: 토너-로션-에센스-크림-자외선차단제
바탕화장: 프라이머-메이크업 베이스-파운데이션-파우더-하이라이터-쉐딩
메이크업 베이스를 사려고 미샤에 가니
흰색, 녹색, 보라색의 메이크업 베이스가 있었다.
네이버 지식인은 메이크업 베이스에 다양한 색상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고심한 끝에 난 자연의 일부니까 친환경적 관점에서
눈을 가장 편안하게 해주는 녹색으로 골랐다.
집에 와서 얼굴에 녹색 메이크업 베이스를 듬뿍 발랐다.
여드름 흔적으로 다소 빨갛던 얼굴이 순식간에 뽀얘졌다.
그 위에다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스펀지로 두들겼다.
처음이었지만 생각보다 꽤 그럴싸했다.
그건 내가 주황색 불빛의 형광등 아래였기 때문이다.
자연광 아래에서 거울을 보자 피오나 공주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저 신난 나는 네이버 지식인이 가르쳐주는대로
붓에다가 황금색의 하이라이터를 묻혀서
이마와 코, 턱에다가 대담하게 쓸어줬다.
네이버 지식인은 하이라이터의 적당한 양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거울 속에 내 얼굴을 보노라니 누군가 생각났다.
기억날 듯하면서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가 마주친 적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당시의 나는 엄마가 시키는대로 의자에 앉아서
먹고 공부하고 먹느라 엉덩이가 퍼진 여학생이었으므로
아련한 옛사랑의 그림자 따위 있을리가 없다.
고개를 들어 관악산... 아니 형광등 아래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내 얼굴을 비춰보니 그 누군가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고교 수학여행을 갔던 경주 불국사에서 본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이었다.
통통한 볼살이 컴플렉스였던 나는
얼굴을 작게 만들어준다는 말에 쉐딩이 솔깃해졌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양쪽 턱과 콧대의 경사진 곳, 눈썹 앞쪽에
갈색 아이섀도 혹은 블러셔로 명암을 주라고 했다.
수채화로 실기시험 만점을 받은 나는 자신있게
붓에다가 갈색 섀도를 찍어 힘차게 터치했다.
네이버 지식인은 나에게 쉐딩에 적합한 채도를 알려주지 않았다.
쉐딩을 하고 한결 갸름하고 인상이 또렷해진 나는 그림 속의 여자 같았다.
내가 말하는 그림이 천경자 화백의 작품이라는게 문제라면 문제다.
어떤 꼴인지 궁금하시다면 구글 이미지에서 천경자로 검색하면 된다.
간이 안 좋아보이는 얼굴색을 한 여자친구를
싫은 내색 않고 데리고 다닌 구남친의 배려에
뒤늦게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때의 나는 25살이 되면 볼에 붙은 젖살이 빠진다는
엄마의 말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철썩같이 믿었는데
26살이 되던 0시,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깨달았다.
이건 젖살이 아니라 그냥 살이었던 것이다.
눈썹은 얼굴의 지붕이라고 했다.
눈썹의 작은 변화에도 얼굴의 전체적인 이미지가 달라진댄다.
나는 네이버 지식인이 가르쳐준대로
아이브로우 펜슬이라는 것을 사서 눈썹에다 그었다.
네이버 지식인은 눈썹 결을 따라 대각선으로 메워야 한다는 정보를 주지 않았다.
나는 아이브로우 펜슬을 들어 눈썹에다
자를 댄 것처럼 가지런한 가로선을 여러 번 그었다.
나중에 과동기에게 들었는데
과에서 나는 한참동안이나
프리다 칼로라고 불렸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