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4월이라고들 한다.
군대를 제대한 후 한 달 여만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세 번의 결혼식과 두 명의 아들, 그리고 세 번의 이혼을 한 막내 아들이
본인의 아들을 키워낼 수 없었다.
나는 할머니 손에 키워졌다.
여섯명의 자녀를 양육하신 할머니는 막내 아들의 아들마저 본인 손으로 키우셨다.
아들이 귀한 집의 유일한 아들이니 당연히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당신의 막내 아들이 두 번째 부인과 얻은 두 번째 손자가 눈에 들어올리 없었다.
게다가 두 번째 손자는 본인의 어머니와 함께 한국을 떠났다.
살아 생전 할머니는 나의 어머니를 무척이나 아끼셨다고 한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헤어진 어머니와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연락을 주고 받았다는 사실을 안 것은
수능이 끝난 겨울, 어머니를 찾아 만났을 때였다.
어머니의 집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어머니 역시 나를 집 안으로 초대하지는 않았다.
집 앞 난간에 어린이용 자전거가 묶여 있었다.
분홍색의 꽃무늬 장식이 잔뜩 있는 것으로 보아
딸이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간 나는 할머니와 고모께
어머니를 만났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환갑의 나이에 손자를 맡으신 할머니께
경제력이 있었을 리 없다.
사위와 딸이 운영하는 사업장의 잡일을 도우시면서
손자를 키우셨다.
물론 할머니의 사위와 딸이 할머니께 서운하게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고모와 고모부의 사업장이 영세한 사업장도 아니었다.
80-90년대 섬유업의 붐을 탄 제법 튼튼한 중소기업이었다.
또한 고모와 고모부께서는 단 한번도 할머니와 내가 함께 있는 것을
못마땅해 하시거나 불편해 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늦은 손자까지
책임지고 키워주는 사위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언제나 사위에게 지극 정성이셨으며
언제나 사위와 딸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셨다.
철이 없던 나는 사춘기를 겪으면서 할머니, 고모 그리고 고모부의
관심에 늘 반항했다. 그때 나는 나의 그런 반항이 할머니를 속상하게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의 반항은 사춘기가 지나고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계속 되었고,
군대에서 휴가를 나오면 꼭 사고를 한 가지씩 치고야 마는 그런 놈이었다.
제대 후 고향으로 내려갔다.
4월이라 길마다 꽃이 많이 피어있었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병원에서 앙상한 얼굴로 나를 맞이하셨다.
나는 언제나처럼 툴툴 털고 일어나시리라 생각하고
병실을 삼십분도 지키지 않고 복학을 준비하겠다며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일주 후,
친구의 생일이라 술을 먹고 있다
할머니께서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았다.
곧장 고속버스 터미널로 달려갔지만,
이미 막차가 떠난 후였다.
어쩔 수 없이 다음 날 아침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갔고
병실에 누워계셨던 할머니는
영정 사진 액자 속에서 온화하게 웃고 계셨다.
할머니는 원래부터 고운 분이었다.
고모, 고모부는 장례가 끝난 후 사업을 위해 외국으로 가셨다.
사업이 잘 되지는 않았지만 조카의 생활비를 책임져주셨다.
문득 나는 자살하지 않을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물론 나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 죽기로 결심했다.
날을 정해 술을 많이 마시고 죽기로 결심했다.
하늘에 낀 구름으로 한 낯이 밤처럼 어두운 날이었다.
비를 잔뜻 맞고 집으로 들어간 나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사람들이 잘 가지 않은 술집을 찾아 집을 나섰다.
전화가 울렸다.
외국에 계신 고모님의 목소리는 감이 멀었다.
비가 내리고 있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잘 지내니?"
"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네. 서울에는 비가 많이 오네요."
"어젯밤에 할머니가 꿈에 나오셨거든."
"네? 뭐라고 하셨어요?"
"너한테 무슨 일 있는 것 같다고 전화해보라고 하시더라"
"......"
"여보세요"
"......"
"여보세요"
"네. 건강하시구요 죄송합니다"
할머니는 환갑의 나이에 마지막 손자를 받아 키우시고
25년 후 그 손자를 살려주셨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사람들은 4월을 잔인하다고들 한다.
우리가 문학 동호회인지 알게 만드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