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만한 글들


1.그 때, 그 골목

어렸을 때 연탄가스를 마신 적이 있다고 아내에게 얘기했다가

타임머신을 타고 온 새마을운동의 역군;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받아낸 후,

확실히 이 나라가 연단위로 종니 빠르게 발전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제가 하얀 고무신 신은 아이들 부러워하는 검정 고무신 세대는 아니고

80년대 초반의 흔한 서울 시내 골목,

그러니까 골목마다 공구리;를 쳐 놓은 쓰레기통이 외부로 튀어나와 있고,

각각의 대문에는 사자입이 문고리를 텁~하고 물고 있는 형태의 손잡이가 달려 있고,

마당에는 사루비아나 아카시아가 한 그루씩 자리를 잡고 있는

그런 평범한 단독주택 밀집지역에서 자랐거든요.

미닫이 문과 다리;가 달린 흑백TV와,

국내 통신망 확대를 위해 체신부;에서 공짜로 집집마다 뿌려놓은 검정색 다이알 전화기,

골드스타 및 아남내셔널; 전자제품과 럭키치약의 시대.

포니;의 심볼인 조랑말; 앰블럼을 누가 떼어내갈까 커버를 덮어놓던 시대.

아람단; 유니폼이나 OB베어스어린이 회원 가입 기념 티셔츠를 입고 등교해도 부끄럽지 않았고

짜장면이 전 우주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던 시대.

전 그런 시대를 살았어요.

에흇 늙은이 냄새.




2.그 때, 아버지

그 당시를 살았던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그랬듯이

저희 아버지도 남산타워보다 높고 거대한 노동량에 비해 수입은 그닥 크지 않았어요.

한달에 한번 노란;색 월급봉투를 들고 들어오셨는데

그 때마다 엄마 표정이 밝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쥐꼬리만한 월급에도 불구하고

경상도 두메산골에서 5백원; 들고 상경한 이 무서운 집념의 남자;는

가장이라는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쉬지 않고 고군분투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유난히 바빴던 아버지는 제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입학식이나 졸업식에 한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그랬던건지 언제부터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 부자 사이는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추억도,

어떤 애틋한 감정도 찾아보기 힘든 참 무뚝뚝한 부자 사이가 되었던 것 같아요.




3.어려운 사람

그랬어요.

밥상에서는 아버지보다 수저 먼저 들면 안되고,

아버지 식사 끝나기 전까지는 먼저 일어나서도 안되고,

아버지가 집에 오시면 달려나가서 인사해야 하는,

그래서 아버지는 늘 집안에서 무시무시한 권력자이자 절대자였어요.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그래요.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고함과 호통', 어머니 돌아가시고 난 후는 '침묵'.

어머니가 위암 재발로 병상에 누우신 후,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리 아버지가

'부엌에서 냉장고에서 물 꺼내는 일'말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고

몰래 흐느껴 울 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네요.




4.기억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까만색 비닐 봉지가 떠올라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착한 어린이가 되기 위해 잠드는 9시'에 잠들던 어린 시절,

어머니는 가끔 '아버지 오셨으니까 인사하고 자라'고 우리 형제를 깨우셨는데

그때마다 졸린 눈을 비비고 간신히 일어난 우리 형제의 눈 앞에는

까만색 비닐 봉지를 든 아버지가

"애들 그냥 자게 내버려두지. 뭐하러 깨워?" 라며 어머니를 나무라고 계셨지요.

까만색 비닐 봉지 안에는 '계란과자'나 '딱따구리' 같은 과자나

군고구마나 오방떡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고

한창 먹으라는 밥은 안 먹고 군것질만 하던 어린 형제는

형식적으로 '아버지,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그것들을 쳐묵쳐묵;했었지요




5.비닐 봉지에 담긴 마음

늦은 밤, 아마도 야근에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하시던 아버지는

바빠서 같이 놀아주지도 못하는 게 못내 안쓰러웠던 자식 모습이 눈에 밟혔을 것이고,

그래서 주위를 기웃거려 불이 켜진 가게를 찾다가

하다못해 군고구마 하나라도 사서 그 까만 비닐 봉지에 주섬주섬 담아 밤길을 걸어오셨겠지요.

조금씩 나이를 먹어서였을까요,

캘빈 클라인이니 게스니 하는 수입 청바지들이 국내에 돌기 시작해서였을까요.

그러니까 그런 브랜드의 쇼핑백이 보일 때쯤

우리 형제는 그 '미드나잇; 까만 비닐 봉지'에 더 이상 열광하지 않게 됐어요.

사춘기를 넘어서며 그 까만 비닐 봉다리가 귀찮고 부끄러웠던 거지요.

쇼핑백에 비싼 청바지를 넣어서 선물이라며 덥썩 건네주지 않는 아버지 또한

까만 비닐 봉지처럼 귀찮아하고 부끄러워하고 있었던 거에요.

그 때는 그 안에 들어가있던 마음을 보지 못 했죠.




6.당신의 인생

아버지는 말이 없지만 늘 "너는 너의 인생을 살아라"라고 행동으로 말씀하셨어요.

쿨;하시죠.

그래서, 전 제 인생을 그냥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어요.

결혼할 때 "아버지 저 결혼해요"라고 전화했더니

결혼할 사람은 어디서 만났냐, 부모님은 뭐하시냐, 집은 어디에 구했냐,

이런 말 한마디도 없이

"언제?"라고 되묻고, "어디서?" 라고 한번 더 묻고 끊으셨어요.

정말 쿨;하시죠

결혼식에 오셔서도 남 결혼식 오신 것처럼 부조금 내고 식사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애정이 없다'라고 할 수만은 없는 것이

딱딱하고 거친 표현으로 함축적인 한 마디를 해주셨거든요.

"잘 살아라."

아, 이건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가 없는데 전 느꼈어요.

그 말 한마디에 담긴 강한 애정을.




7.마음과 마음

2년 전에 강원도 산골짜기에 있는 황무지를 조금 구입했어요.

제가 비록 경기도에서는 세입자;지만, 강원도 가면 지주;랍니다.

쥐꼬리만한 땅덩어리지만,

평당 구매가가 리바이스 청바지 하나 가격도 안 되지만,

뭐 아무튼 눈물을 머금은 저를 향해 지주라고 불러주세요.

정원을 만들고 있어요.

돈 벌어서 차에 쓰고, 집에 쓰고, 옷에 쓰고 그러지말고

황무지; 조금 사서 정원을 꾸며보자는 것이 저희 부부의 합의사항이어서

소나무도 심고, 수국도 심고, 벚꽃나무도 심고, 철쭉도 심고, 잔디도 심고,

주말마다 삽과 곡괭이와 리어카;를 벗삼아 살고 있어요.

그래봐야 서울 촌놈이 해봐야 얼마나 진도가 빠지겠어요. 손만 다 까지고.

아직 황무지 수준인데 그래도 작년에는 은행나무 그늘 아래 일단 평상 하나 뙇 하고 놓고

하나로마트에서 3만원;짜리 그릴 하나 사서 뙇 놓고

아버지와 친구들 초대해서 한우숯불구이 퍼리; 한번 해드리면서

'감사패'를 하나 만들어서 드렸어요.

"아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애정과 관심을 아끼지 않으셨기에 이 감사패를 드립니다."

아버지가 작년에 칠순이셨거든요.

친구분들이 옆에서 "아들 잘 뒀네. 이렇게 좋은 별장이 어디 있나" 하시는데

낮술; 드시고 평상에 누워 낮잠을 주무시는 아버지 모습이 얼마나 평화로웠는지 몰라요.

컨테이너를 개조한 농막;과 이동식 푸세식; 화장실로 구성된

'별장'에서 말이지요.




8.아버지와 아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받아 온 교과서에 아버지가 지난 달력으로 옷;을 입혀주신 적이 있어요.

교과서가 낡지 않도록 포장;을 해주신 거였는데

착착착 자르고 접어서 커버를 만드시더니

국어, 산수, 사회 같은 교과서 제목을 붓글씨로 쓰윽 적어주셨어요.

아버지가 어렸을 때 서당;;을 다니셔서 글씨를 참 잘 쓰시거든요.

근데, 그때는 그게 창피했어요.

달력이 뭐야 우와앙 -_-

지금 그 때로 돌아가면 고맙다고 배꼽인사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그 때는 어렸으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죠.

그 작업을 하시던 그 때의 아버지 얼굴이 굉장히 평화로웠던 것으로 기억나요.

무언가 자식에게 해줬다는 뿌듯함이랄까.

평상 위에서 낮잠을 주무시던 그 얼굴과 많이 비슷했지요.




9.그렇고 그런 관계성

자녀 기르는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자식한테 뭐 받;;으려고 낳아 기르는 건 아니잖아요.

저를 낳고 기른 것이 아버지로서는 '어른의 선택'이었을 것이고

그 선택으로 아버지는 제가 무럭무럭 자라 즐거웠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물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힘겹기도 하셨겠지만

모든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충분히 감당하는 것일 때 온전한 거 아니겠어요.

부모와 자식은 그런 것 같아요.

도리 없는 시나리오죠.

채권과 채무의 관계가 아니니, 양자 공히 해피할 방도도 없고.




10.잘 살아보세

해외여행을 보내드리는 것이 효도가 아니고,

몇백만원씩 용돈을 퍽퍽 드리는 것도 효도가 아니고,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효도구나 , 라는 생각을 해요.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좀 자랐나요.

뭐 살면서 저절로 생기는 것은 주름살이나 뱃살만은 아니겠지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에는 내가 잘 사는 게 효도고, 애국이고, 우주의 평화고 그런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봄비가 오네요

다음주쯤 내려가면 정원에 잔디가 올라와 있을테니

아버지 모시고 가서 낮술;이나 한 번 같이 해야겠네요.





2012.04.25 17:28:20
1. -_-
참 좋은 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아버지 생각을 하면 화가 나고 답답하고 그래-_-;
2012.04.25 17:32:22
2. -_-
글구 보니 아남전자 어디갔나. 아남 꺼 꽤 많이 썼는데. 생각해 보면 15년전만해도 전자업계가 엘지 삼성 대우 3강에 아남, 인켈 등등에 해태전자;까지 있었는디
2012.04.25 17:34:27
3. monohy
늘 잘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04.25 17:35:06
4. -_-
으허으허..눈물난다.

나도 어렸을때 아부지가 가끔 늦게 퇴근하시면서 통닭이나 과자 사올때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내가 퇴근하면서 먹을거리나, 장난감 사면서 그거 받고 기뻐할 아들넘 얼굴 떠올리면 빙긋이 웃다가도 가슴 찡해지기도 해.

울 아부지도 똑같은 마음이었겠구나 싶어서.
2012.04.25 17:39:14
5. -_-
이야 번옵; 아니..형님의 글을 일빠로 읽게 되다니!!!
2012.04.25 17:39:39
6. 5
(추천 수: 1 / 0)
...일리가 없지 -_-
2012.04.25 17:49:48
7. -_-
아.. 맞아 사루비아가 있었지 ㅋㅋ
2012.04.25 18:09:16
8. -_-
내셔널ㄴㄴ내쇼날ㅇㅇ
2012.04.25 19:33:32
9. -_-
내쇼날ㄴㄴ나쇼날ㅇㅇ
2012.04.25 20:18:28
10. -_-
번옵;; 이랑 나랑 비슷한 연배인듯..
글보면서 돌아가신 아버지생각이 나서 울컥했어요.
젠장.. 비도 오고 갑자기 따뜻하면서 우울해진다.. ㅠㅠ
2012.04.25 20:24:50
11. -_-
아 너무 공감가는 풍경들과 너무 공감가는 마음이네요... 저도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울컥 했습니다 ㅠㅠ
2012.04.25 20:31:57
12. -_-
지하철인데 눈물이....아 씨발
2012.04.26 00:16:46
13. -_-
내가 솔직히 그 동안 이 사람 글이 참 맘에 안 들었었는데 말야 ㅜ_ㅜ
2012.04.26 01:14:32
14. ㅡᆞㅡ
2012.04.26 01:21:49
15. -_-
맞아맞아

내가 행복해야 가족도 행복하고 나라도 세계도 우주도 평화로운듯. 우주평화!
2012.04.26 02:25:51
16. -_-
저보다 몇살위 형님이신듯.
저희 아버지도 올해 칠순이셨는데... 아 전 막내라서..
여행보내드리고 별다른 일을 못했던게.... 그냥 돈으로 쳐바르고 말았던거 아닌가 싶어서...
반성되네요...
안그래야지안그래야지 하면서도 이내 틱틱거리는 이 버릇없는자신노므새끼...
미혼이지만, 나중에 제자식이 저만큼커서 저한테 그러더라도 제 업보이겠거니 해야겠습니다...
당장 내일부터 아버지께 잘할 자신은 없네요.
하지만 마음만큼은 항상 간직하려구요.
덕분에 감사합니다. (__)
2012.04.27 23:45:42
17. -_-
와...나도 어렸을때 교과서 달력으로 포장;해서 다녔었는데...
그리고 좀 후에 문방구에서 비닐로 된 교과서 포장지 사서 씌우고..

진짜 전생의 기억 같은 추억이다..
2012.06.13 12:36:07
18. -_-
버노 부장님 글 많이 읽다가 처음으로 댓글 남깁니다.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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