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녹여서
증발을 시킬 셈이지
바람 한 점 없는
그늘 한 점 없는
한여름 오후, 버스정류장
시원한 커피숍에서 만나면 좀 좋아
해 좀 넘어가고 보든가
저 봐, 저 봐, 도로를 밟으면 푹-하고 발목까지 빠질걸
내가 진짜, 여기 또 서 있으면 사람새끼가 아니다
야아, 해가 미쳤구나
나도 미치겠다
한 정거장 앞이었나
서 있다 죽으나 걷다 죽으나 매한가진데
미친 척 한 정거장 걸어가볼까
그제야 느릿느릿,
신기루처럼 버스가 나타난다
버스가 서고,
문이 열리고,
니가 내리면
아, 가슴 속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었었는데
1.첫사랑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라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카피를 보며
문득 사랑 따위가 밥 먹여주냐는 꼰대의 마음으로 사는 스스로를 바라보게 됩니다.
물론 사랑 따위가 밥을 먹여주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 '사랑 따위'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뭔들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2.타인의 첫사랑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한 15년 정도 전에
아는 형 A가 첫사랑에 실패하고
마나 부족한 법사;마냥 비틀거리고 있었더랬습니다.
그럴 때 20대 초반의 남자들은
모여서 산적;처럼 술과 고기를 먹으며 이런 말을 하죠.
지구의 절반은 여자고, 똥차 가고 벤츠 오고, 남자가 여자 따위에 휘둘려 살면 안 된다고.
저 또한 당시까지 가슴 뽀;개지는 사랑을 겪지 못 했던 중2병; 환자였기에
"가슴이. 너무. 아파"라고
문장을 띄엄띄엄 읽듯 내뱉는 A엉아의 슬픔이 실감나지 않았더랬습니다.
싸나이가 여자 때문에 그라믄 안돼. 그리고 가슴은 아픈 게 아니라 물고 빨고 만지는 거야.
그러니 일단 내가 주는 술부터 받아.
3.나의 첫사랑
첫'연애'가 아닌 첫'사랑'은 서른이 넘어 찾아왔습니다.
네. 부처님과 예수님이 깨달음을 얻었던 나이에 저는 첫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숙아라고 불러도 좋아요. 하지만, 미숙아라고 놀리는 건 참을 수 없네요.
음?
아주 행복했고, 아주 처절;했어요.
처절함을 에너지로 바꿔주는 기계가 있었다면 원전;을 대체시킬 수 있었을 거에요.
에픽하이의 Love Love Love 라는 노래가 있는데요.
그 노래 가사에 나오는 거 다 해봤어요.
그리고나서야 알게 됐어요.
가슴이 아프다, 라는 말을.
4.누구나 가슴이 아프다.
원조 소간지 소크라테스 횽이 "너 자신을 알라"고 얘기한 것이
근 2천년이 넘게 전해져 내려온 이유는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공감을 했기 때문일 거에요.
'슬프다'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도 마찬가지겠죠.
누가 제일 먼저 썼는지, 언제부터 쓰여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누군가 저 말을 썼을 때
누구는 슬플 때 불알;이 아프고, 누구는 슬플 때 왼쪽 장딴지;가 아프고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슬프면 '가슴이 아팠기' 때문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아 그래!'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저 말을 하고,
그 사람들이 다시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말을 했을 거에요.
아마도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쭈욱.
5.마음의 위치
우리가 슬플 때 아팠던 그 '가슴'은 아마도 '마음'일 겁니다.
슬플 때 유두;나 유륜;이 아픈 건 아니잖아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중에 슬플 때 유두 언저리가 아프신 분이 있으시다면 죄송한 일입니다만
하여튼.
'마음'이란 녀석은 우리 가슴 속 어딘가에 있는 모양인데
정확히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어요. 가슴이 아팠던 적이 없었으니까.
'위'의 위치는 확실히 알 수 있었지요.
위액을 토할 때까지 소주를 마시고 난 다음날 아침
위는 자기가 어디쯤에 있는지 확실하게 알려줬거든요.
술과 위액;이 지겨워질 정도가 된 다음
'차가운 탄산음료를 가슴 속에 엎지른 듯한 느낌'으로
마음이 자신의 위치를 알려줬지요.
"안녕하세요. 처음뵙겠습니다. 마음입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그 사람'이 내 가슴 속에 차가운 탄산음료를 엎지르면
잠시 멍한 상태가 되었다가 생각을 했어요.
"아 내 마음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구나!"
아 뭐 이런 잔혹한 유레카;가 다 있나.
6.고마해라 마이무으따아이가
마음의 위치를 알게 된 것까지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젠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았고 제발 좀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그냥 끊어지는 전화, 기념일, 어떤 노래, 어떤 영화, 어떤 까페, 어떤 사진, 어떤 물건 앞에서
마음이란 녀석은 '잊지 않았겠지? 난 여기서부터 여기에 걸쳐 있어'하며
주기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꼬박꼬박 알려왔어요.
알람기능 있습니다.
알았다. 이제 됐다. 그만 해라.
아무리 말을 해도 마음은 불수의 근;과 같아서 대뇌의 명령을 듣지 않아요.
장기 같으면 수술로 도려;내고 싶은데
보이지도 않고, CT를 찍어도 나올 거 같지도 않은데도 막 아프니 이거야 원.
침;을 맞아볼까.
7.성장과 치유
사랑이 위대한 건 삶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지평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에요
조규찬의 '잠이 늘었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와요
"요긴하다면 너의 선물도 써. 슬프지 않은 내 모습이 보여."
시간의 힘은 참으로 놀라워서, 결국 덤덤해지는 때가 왔어요.
통증은 잦지 않고 강도도 강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마음이란 녀석도
제대 후 우연히 만난 무서웠던 군대 고참;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얼마를 가져야 행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모범 답안처럼
그 사람 하나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날들은
이기적인 인간으로 돌아와 꾸역꾸역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애잔한 의문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 그리워하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그 때의 행복했던 나'일지도 모르겠다.
슬프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8.해피 엔딩이란
첫사랑이란 말에는 왠지 언해피엔딩이란 뉘앙스가 있습니다.
왠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 같아요.
보통의 동화 같은 경우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나는데
모든 사랑의 해피엔딩이 결혼해서 같이 사는 건 아닐 거에요.
가슴이 너무나 아프다고 펑펑 울던 A형이랑 오랜만에 만나 그런 얘기를 했어요.
우리 마음의 위치를 알게해줬던 그 사람들과 결혼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농담처럼 이런 얘기를 했어요.
가슴 한 켠에 차가운 콜라 엎어지는 대신 밥상; 몇 번 엎어졌을 거 같다고 -_-
그 얘기를 하면서 이루어지지 않아서 슬펐던 그 사람과의 사랑은
슬프지만 '해피 엔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9.추억
'모든 추억은 자작극'이라는 말이 있어요.
청춘의 애틋한 추억은
청춘의 뜨거운 가슴으로 편집을 했기 때문에,
청춘의 뜨거운 가슴으로 왜곡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애틋한 거죠.
그리고, 우리는 한참 후에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시인의 마음으로 당시 끄적였던 글을 보며
다시 한번 마음에 탄산음료를 엎게 됩니다.
뻔히 돌아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묘하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시큼;한 무언가가 안에서부터 자꾸만 올라오고 있어요.
정말 그 때는,
하아,
가슴 속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