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탈 없이 잘 놀던 아이가 어제 저녁에 설사를 한 번 하더니
밤이 되자 밤새 마구 토하기 시작했다. 놀라서 진정시키느라 물을 약간 먹였는데, 그 물마저도 다시 모조리 게워낸다.
아차, 또 장염에 걸렸구나.
어린 아이에게 장염이라는 병이 얼마나 힘든지 여러번 겪어봐 잘 알기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아이가 토하는 것을 받아내며 밤을 샜다.
아이가 아프면 부모의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헌데 사람이 그런건지 나만 이기적인건지 몰라도 언제부턴가 아이가 아프면 아이가 걱정되는 것에 곧 이어
한동안 또 내가 많이 힘들겠구나 하는 한숨도 함께 나온다.
며칠간 몸이 아픈데다 좋아하는 음식까지 먹지 못하는 아이의 병치레를 온전히 나의 육체 및 정신 노동으로 이겨내야 한다.
'아이가 한 번 앓았다 나으면 이제는 엄마가 아플 차례'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이 글은 아이를 키우지 않는 이에게는 아주 길고 지루한 한 유부녀의 신세한탄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아니,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길고 지루하더라도 한 번은 읽어봐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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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성 애착장애. 다른 말로 유사 자폐.
지난 봄, 내 아이가 받은 판정이다.
자폐라니. 내 아이는 어릴때부터 부모와 눈도 잘 맞추고 방실방실 웃기도 잘 웃었건만 자폐라니..
검사를 받기 며칠 전 친정엄마와 전화통화를 했었다.
"엄마, 나 아무래도 애 데리고 검사 한 번 받아보려구."
"왜?"
"이러 저러한 걸 봐서 혹시 자폐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좀 들어.. 뭐 아닐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한 두가지 비슷한 증상이 있는 것 같아서.. 그냥 검사 받고 아니라는 걸 확인하면 마음이 편하잖어~"
"그래, 그럼. 괜히 걱정하지 말고 검사나 받고 얘기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아이를 데려간 곳에서 받은 판정이 다름 아닌 유사자폐였다.
유사자폐, 반응성 애착장애는 자폐와 비슷한 증상이지만 선천적 질병인 자폐와 달리 후천적인 요인으로 나타나는 질병이라 했다.
그리고 병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 직장을 다니느라 아이를 직접 키우지 못한 엄마, 그리고 불완전하게 형성된 엄마와의 애착이 그 원인이었다.
내 아이는 또래 아이들보다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조금씩 느렸다.
그리고 건방진 부모인 나는, 내가 부모로서 가져야 하는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믿었고,
그 확고한 신념 중 하나가 '아이 천천히 키우기' 였다.
아이를 두고 조바심 내지 않기. 조기교육 같은 걸로 휘둘려 다니지 않기. 무엇이든 아이가 혼자 해낼 수 있을 때 까지 믿고 기다려주기.
나는 그 신념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아이가 걸음마가 느리고 말이 느려도 "때 되면 다 해" 라며 그냥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다. 실제로 그 정도 늦는 아이들은 찾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다만 두돌 즈음부터 차마 말로 하지 못하는 걱정거리들을 조금씩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하나는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주 양육자인 할머니(시모)를 그리 좋아하며 따르지 않는다는 것,
또 엄마, 아빠, 할머니라는 단어를 말 할 줄 알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를 그렇게 부르며 따르지를 않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난히 쌀쌀맞고 새침하더라는 것이다.
아이가 엄마 아빠를 살갑게 부르지 않는 것이나, 사람들에게 별 관심 없는 것은 그저 아이 성격이려니 하는 마음이 있었다.
낯가림도 워낙 심했던 아이라, 그게 오래 가는 탓에 다른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려니 했다.
하지만 할머니를 따르지 않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던 거다.
물론 할머니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주 양육자이기 때문에 아침에 할머니를 보면 반가워하고 저녁에 헤어지면 아쉬워해야 할 것 같은데도 아이는 늘 할머니에게 시큰둥했다.
수 많은 육아서적을 보면 세돌 전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엄마(주 양육자)와의 애착 형성이라는데,
그래서 나와 아이 사이에 보이는 어색한 벽도, 할머니와 견고한 애착을 쌓으면 괜찮겠지 라며 애써 신경쓰지 않으려 했었는데,
할머니와 애착이라는 게 도저히 보이지 않으니 그제서야 나는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고 검사를 받으리라 다짐하게 된 거였다.
눈 앞이 캄캄하다는 말.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
이럴 때 쓰는거구나.. 싶도록, 아이의 병명은 나에게 너무 아프게 다가왔다.
상담센터는 아이에게 문제가 보이니, 우리 가정의 문제를 찾으려 애 썼다.
아이 아빠가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아닌지, 아이 엄마가 심한 산후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부부관계에서 문제점을 찾기 위해 아주 사소한 것까지 물어보고 우리는 대답해야 했다.
우리는 그저 평범한 맞벌이 부부였는데, 스스로 화목하게 잘 살고 있다 생각했었는데,
우리 사이의 문제를 어떻게든 찾아내려 하는 상담센터 선생님들을 보며 또 한 번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를 문제 부부로 보는 그 시선이 아픈 것이 아니라,
"아이가 이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너희 둘이 원인이다" 라는 강력한 메세지를 온몸으로 느껴야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새벽부터 눈을 떠서 아이를 할머니에게 보낼 준비를 하고
출근을 해서 종일 일을 한 후 시댁으로 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고
또 다시 밀린 집안일을 하고, 아이 젖병을 삶고, 아이 옷을 빨고, 아이 목욕시키고 하며
12시는 되어야 하루 일과가 끝나 겨우 쉴 수 있는 생활을 하며 지난 2년을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래도 아이 병의 원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였다.
"불완전한 엄마와의 애착이 원인입니다."
"세돌 전의 아이는 엄마가 주 양육자가 되어주지 못할 경우, 양육자와 온전한 애착을 가지면 되는 거 아닌가요?"
"물론 그렇지만, 그래도 엄마와의 견고한 애착 없이는 아이는 잘 자랄 수가 없어요. 엄마와 아이간의 애착은 아빠도, 할머니도, 그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거든요."
아이의 병을 내가 키웠다는 자책이 너무 힘들어
아이 아빠가 집안일을 조금 더 해줬더라면 나도 아이랑 같이 보낼 시간을 더 가질 수 있었을텐데.
시모와 아이간의 불안정한 애착만 아니었어도 아이가 이 정도로 나빠지지는 않았을텐데.
라는 위로도 스스로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건, 아이를 위해 내 인생의 대부분을 할애하며 시간을 보냈건, 내가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다 떠나
아이가 아픈 것은 내 탓이라고 상담 선생님도, 친정 엄마도,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내 아이를 바라보는 모든 타인의 시선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를 다시 바르게 키워낼 수 있는 사람도 나 뿐이었다.
바로 놀이치료를 시작했고,
나는 회사에서 사정을 봐주어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아이가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은 아이와 나 사이의 얄팍한 애착을 두텁게 하기 위해 온전히 쓰여졌고
아이가 잠시 낮잠이라도 들면 그제서야 나는 밀린 집안일을 하고, 아이가 밤잠에 들면 또 회사 일을 해야 했다.
정말 하루에 5분도 편히 앉아 쉴 시간이 없이 하루에 서너시간도 겨우 자며 미친 여자처럼 살았다.
그래도 정말 힘들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하루 하루를 넘길 수 있었던 건
자고 일어나면 또 달라져있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남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일상이지만
아이가 나를 엄마라 부르며 안기고, 나와 마주보며 웃고 함께 놀이를 하는 그런 호전된 모습이
식구들도, 상담센터 선생님들도 모두 감탄을 하리만치 빨리 다가왔다.
완치까지는 적어도 1년 이상 걸릴거라는 선생님들의 말이 무색하도록이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고
한달쯤 지났을때는 무려 절반 이상 걸어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그 즈음되니 미처 생각지 못한 시간이 돌아왔는데,
모두가 나에게 미리 경고했던 일종의 '명현 현상' 이었다.
전에는 항상 아침이면 자기를 떼어놓고 나가던 엄마가, 집에서도 등돌려 설겆이나 청소를 하고 있던 엄마가
언제부턴가 집에서 온전히 자기와 시간을 보내고 자기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 주고 있으니
아이에게는 이런 엄마의 모습이 혼란스러워, 엄마의 애정을 확인하려 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의 나이는 만 2세였지만,
나는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돌 전에 내가 안아주고 업어주지 못했던 시간을 아이가 세살이 되어서야 채워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는 지금의 나이가 몇살이건 그 물리적 나이와 상관 없이
어릴 적 엄마와 살을 부벼야 할 만큼 부비고, 떼를 써야할 만큼 다 쓰고 나야 비로소 그 다음 나이로 클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두 발로 잘 걷고 뛰는 근 15킬로그램이 나가는 아이를 데리고 다닐때에도
항상 안고, 업고 다니며, 그렇게 하지 못한채 지나간 시간을 아이에게 보상해주어야 했다.
아이가 그간 나에게 부리지 못했던 응석도 모두 받아주고, 그간 나에게 내지 못했던 화도 모두 받아주어야 했다.
미련하게도 불과 몇 달 전이지만 그 때 내가 얼마나 힘이 들었었는지 잘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몸은 망가질대로 망가져있고, 보는 식구들이 모두 나를 무척 안쓰러워했다.
이 시간도 언젠가는 다 지나가겠지 라는 마음 하나로 버텼다.
이 시기의 아이는...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 라는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문제아(?)들은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대화는 통하지 않고, 하루에도 몇 시간씩 울며 떼쓰고, 단 5분도 엄마 등짝에서 떨어지지 않는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는데
이 시기를 잘 보내야 아이도 안정을 찾는다 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몇달이 지나고 아이도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이 한줄로 설명이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동안 나는 수백, 수천번의 울음을 참아내야 했고,
그러면서도 내가 힘이 들때마다 수도 없이 밀려드는 '아이를 이렇게 만든건 나'라는 자책을 이겨내야 했다.
그리고 아이가 어느정도 안정을 찾자
나에게는 참기 힘든 우울증이 함께 찾아왔다.
아이가 정말 아플때는 우울증을 앓을 여유마저 없다가, 말 그대로 좀 살만해지니까 그제서야 찾아오는 게 우울증이더라.
아이의 양육자였던 시모도, 아이 아빠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모든 걸 내탓이라 생각하고 내가 이겨내리라는 다짐이
우울증과 함께 모두 무너지며 시댁에 대한 원망과 아이 아빠에 대한 원망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커졌다.
아이를 옆에 두고도 온 종일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
정말 아이를 다시 뱃속에 집어넣고 처음부터 다 다시 시작하고만 싶었다.
시모에게 아이를 맡기지 않고 그냥 처음부터 내가 다시 시작하면 다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가끔은 아이를 보며 '내가 왜 이 애를 낳아서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거지' 하는 후회까지 들었다.
하지만
"나 힘들어요." 라는 말을 꺼내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런 말을 꺼낼 자신도 없었다.
그 말 한마디를 하고나면 겨우 버티고 있던 내 의지가 한꺼번에 모두 무너져 내릴 것 만 같았다.
내가 힘들다는 사실을 내 스스로 인정하면 안되었다. 나는 지치지 않고 아이가 좋아질 때까지 쉼 없이 달려가야만 한다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 뜻과는 다르게 나는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고, 달려갈 기운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상담센터를 찾아가
제가 요즘 너무 힘든데요... 라 겨우 입을 뗐다.
그리고 그 말 한마디와 함께 더욱 참기 힘든 우울증이 밀려왔다.
내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며 어떻게든 버텨오던 그 둑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힘들다고 이야기 할 수록 더 힘들고 외로웠다. 말을 하고나면 훌훌 털고 홀가분해질 줄 알았는데, 마치 그 말 한마디가 자석처럼 세상의 모든 우울증을 끌어당기고 있는 듯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한없이 추락하는 것 같았다.
엄마라면 당연히 했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이렇게 버거워하다니 나는 정말 엄마 자격이라는 게 있는걸까.
아이가 누구때문에 이렇게 된건데 나란 년은 참 양심도 없구나.
이런 자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런데 상담 선생님이 차근히 내 말을 듣고 하시는 첫 말이
"** 어머님은 참 강하네요." 라더라.
"벌써 몇달 전부터 힘들다는 하소연을 하겠지 하겠지 하며 기다렸는데 그런 말 한 번 없이 매일 웃으면서 상담을 오시더라구요.
어머니가 언제쯤이나 힘들다는 말을 하실까 기다렸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줄은 몰랐네요. ** 어머니는 정말 강한 사람이네요. 그래서 **가 이렇게 빨리 좋아지고 있는가봐요."
그렇게 나는 끝없는 자책에서 주변의 도움을 받아 다시 제 정신을 찾았다.
그리고 두달 전 나는 완전히 퇴사하여, 아이만 돌보는 전업주부가 되었고
아이는 한달 전, "반응성 애착장애 증세는 이제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물론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아이가 앓았던 그 병으로 인해 발달이 많이 지연된 상태이고, 그 헝클어진 아이의 발달 단계를 제 자리로 잡아주어야 하는 시간이 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건 지나온 시간보다 더, 훨씬 더 많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내 아이는 매 번 내 기대보다 더 앞서서 좋아지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울보, 떼쟁이, 징징거리기 대왕 20대 철부지 처녀는 나이를 먹고 아이와 함께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낸 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자책도, 걱정도 없다.
밝게 웃고 큰 목소리로 이야기 하는 아이와, 그런 아이를 키워냈다는 자신감을 가진 엄마만 남았으니까.
다만 이 길고 지루한 이야기를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유.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몇가지만 꼭 당부하고 싶다.
하나. 아이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할머니도, 아빠도, 도우미 아줌마도 혹은 세상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더라는 것.
아이와 엄마와의 견고한 애정만큼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없으니 세상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많은 육아서적을 통해 이미 다들 알테지만, 이런 견고한 애착을 위해 반드시 엄마가 직장을 관두고 집에서 애를 키워야 하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엄마가 키우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안된다면 하루에 최소 1시간만이라도 아이와 엄마가 온전히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면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하는데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다만 그 1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가장 문제일테고.
나는 지나고 나서 가장 후회가 되었던 것이, 아이 아빠가 집안 살림이 서투르다는 이유로 아이를 아빠가 보게 하고 나는 주로 집안일을 하려고 했었다. 집안이 쑥대밭이 되건, 쓰레기통이 되건 그런건 두번째 일이고 나는 남는 시간에라도 아이에게만 집중했어야 했는데 그걸 못했던 게 가장 아쉽다.
또 그 아이와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두번째인데, 이 부분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아이가 아픈 걸 안 후 놀이치료를 데리고 다니며 배운 것이 정말 많은데.. 아이가 태어났을때부터 아이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놀아주고 하루에도 수십번씩 사랑한다 말하며 물고빨고 했는데..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면 내가 아무리 사랑해주어도 아이에겐 소용이 없는 거라는 걸 그땐 몰랐던 게 가장 후회가 된다. 아이와 시간을 보낼때에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아이의 감정에 공감해주는 게 가장 중요한데 나는 그 방법을 너무 몰랐던 엄마였을 뿐...
시시한 장난감에도 아이가 재미있어하며 웃으면 아이가 지겨워질때까지 그 즐거운 놀이를 되풀이하고 엄마도 같이 크게 웃어준다거나, 장난감이 뜻대로 되지 않아 아이가 화를 내면 엄마도 같이 장난감에게 화를 내준다거나 하는 공감대 형성만 잘 해주어도 아이와의 애착은 엄청 견고해진다.
그리고.. 아이들이 하는 행동은 아주 사소한 하나에도 이유 없는 것은 절대 없다.
예를 들어, 아이가 놀이치료에 가서 한 놀이 중 하나가 악어인형의 입에 끊임없이 구슬을 넣어주며 "자, 먹어~" 하며 놀기였는데, 이는 아이가 구순기(성장~첫돌)를 지나 항문기(첫돌~세돌)를 맞았는데도 구순기에서의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해 구순기때의 욕구가 남아 나타나는 행동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아이의 "입을 통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많이 신경을 써주자 몇주만에 이런 놀이 형태가 금세 사라지고 다음 단계의 놀이로 아이가 스스로 옮겨갔다.
또 한번은 아이가 어느날부턴가 기저귀 가는 걸 너무 싫어하고, 기저귀를 갈아입힐 눈치가 보이면 마구 도망을 다니는거다.
어느날 갑자기 그러니까 이유도 모르겠고, 억지로 입히자니 아이가 스트레스 받을 것 같고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니 한 번 내가 아이 기저귀 가는 것을 귀찮다는 투로 아이 아빠에게 미룬 적이 있는데 아이가 그 한마디에 기저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겨버렸던 것...
그 후로 아이 기저귀를 갈때마다 오백번씩 오바해서 "우리 ** 응가 진짜 이쁘다! 엄마는 우리 **가 응가를 이렇게 크게 잘 해줘서 너무 기뻐요. 너무너무 고마워. 다음에도 또 이렇게 멋지게 응가해주세요~" 라는 식으로 반응을 며칠간 했더니 기저귀를 갈지 않겠다고 도망가는 행동이 나도 모르는 새에 사라졌다.
이건 아주 작은 예시일 뿐이지만, 아이가 어떤 행동 하나를 하는데에도 이유가 없는 것은 없으니 아이의 아주 작은 행동 하나하나도 세심하게 관찰하고 이해해주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걸 꼭 말하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말하고 싶던 건..
직장맘은 어딜 가나 죄인이다. 직장에서는 애 핑계로 회사 일 소홀하다고 죄인, 집에서는 애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해주지 못함에 죄인, 양육자에게는 내 일 이어야 할 육아를 떠맡긴 죄인, 남편에게는 전업주부만큼 잘 챙겨주는 아내가 되어주지 못하는 죄인...
하지만 아이를 제대로 키워낼 수 있는 것도 엄마 뿐이고, 그 자리를 대신 해 나만큼 잘해줄 수 있는 사람도 없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엄마가 항상 즐겁고 당당해야만 하더라. 세상 모두가 흔들려도 엄마만 제 자리에서 굳건히 중심을 지키면 아이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적어도, 정말 적어도 세돌 전까지는 엄마가 그 누구에게 죄인이 되든 신경쓰지 않고 아이만 바라봤으면 좋겠다. 직장생활에 좀 더 소홀해져서 나의 진급이 늦어지더라도, 시댁에 무심한 며느리가 되더라도, 남편에게는 빵점자리 아내가 되더라도 그 모든 건 나중에라도 다시 되돌려 볼 수 있지만 지나가버린 아이의 첫 3년은 평생 되돌리지도 못하며, 30년이 걸려서도 메꿔주지를 못하는 다시 없는 시간이더라.
나도 아이의 발달이 제 자리를 찾고 나면 다시 직장을 찾고 또 누군가의 죄인이 되어 살아가겠지만
다시는 좋은 노비가 되기 위해서, 좋은 며느리가 되기 위해서 아이에게 희생을 지우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이 것은 또 하나 추가된 나의 '부모로서의 확고한 신념' 이다.
수 많은 새해를 맞아왔지만,
올해만큼 감회가 새롭고 지난 한 해를 생각하며 코끗이 찡하던 해는 없었던 것 같다.
새해 다짐이라 하면 매번 "올해는 꼭 살을 빼봐야지." "술 좀 줄이고 운동을 해봐야지" 만 반복해오던 내가
이렇게 굳은 다짐과 목표를 가져보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
새해에 나는 조금 더 성숙하고 흔들림 없는 엄마가 되고싶다.
엄마 품에서 맘껏 부비지 못해 많이 외로웠을 내 아이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고 따뜻하게 1년을 보냈으면 좋겠다.
올해는 이런 다짐을 하며 마무리 해 본다. 이번 새해 소망은 무리 없이 이뤄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