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는 치매 환자시다.
'양반 대가집 종손 큰며느리' 라는 본인의 자부심이 무척 강하시며,
'후덕한 맏며느리' 라는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작고 왜소한 체격을 가진 분이셔
언제나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셔서, 쪽머리 단장을 하시고는
자던 우리를 깨우시던, 늘 단정하고 바른 생활을 하셨던 분이야
어릴 때 부터, 손자들을 불러 모으시고는
지금은 잠시? 기울었지만, 사실 우리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지를 시간 날 때마다 세뇌; 시키셨지...
어디가서든 절대로 기죽지 말고,
보는 사람 하나 없더라도, 하늘에선 조상님?께서 늘 지켜보고 계시니
언제 어디서든 부끄럽지 않도록 바른 일을 하고 정의롭게 살아라
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시던 분이셨어.
세상 모두를 속일 순 있어도,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다고....
그러던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9제가 끝난 이후에, 점점 달라지기 시작하셨어
그 대쪽같은 성품으로, 자식들이 모시겠다는 청을 다 마다하시고는 시골 집으로 혼자 내려 가셔서
홀로 할아버지 묘소 옆에 지어놓은 집에서 생활하셨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이상한 기운?을 느낀 분들이 많아졌고,
결국엔 행동도, 말투도, 여러가지 면에서 달라진 할머니를 걱정하던 분들이
억지로 서울로 모시고 왔고, 검사를 받으셨어
결과는
저혈압, 저혈당, 영양실조 그리고 치매였어
그 이후부터는 요양병원 생활을 지금껏 하고계셔
치매가 걸리면, 아이처럼? 짐승처럼? 본능에 충실해진다고들 하더라
증상이 점점 심해질 수록, 요양원 모든 사람들에게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시기도 하고,
요즘은, 당신 친 자식들에게도
'누구세요?' '어떻게오셨어요?'
'우리 서방님 손님이지죠? 말씀 많이 들었어요.... 사랑채에 가서 잠깐 몸 녹이시면, 일단 술상 먼저 봐 드릴께요'
라고 말씀하시기에 이르렀어
요양병원 침대에서 일어나시지도 못하시면서....
그런데, 신기하게도 손자손녀는 알아보시더라....
우리가 가끔씩 찾아뵈면, 갑자기 정신이 아주아주아주 멀쩡하게 돌아오셔
우리 이름 하나하나 불러주시고, 아주 사소한 옛날 일들 다 기억하시고 얘기하시면서 웃으시고....
우리한테도 약한 모습 보여 주시는 건
그 대쪽같던 성정에 부끄러우신 일이셨을까....?
근데, 요양원 담당 아주머니 말로는
특히 내 얘기를 많이 하신다고 하더라....
우리 xx가 어릴 때 부터 어쩌고 저쩌고, 결국 젋은 나이에 파; 뭐시기가 됐네 어쩌고 저쩌고
보이는 사람만 있으면, 붙들고는 그렇게 자랑을 늘어놓으신데....
우리 할머니 손자가 얼마나 많은데.... 물론 그 요양원 아주머니가
나 듣기 좋으라고, 좀 자주 찾아오라고 하는 소리겠지?
내가 가면 아주머니들 고생하신다고 조금이나마 챙겨 드리고 하니까
하고 흘려듣고 있었어
지난 1월 1일에 찾아뵈었을 때
아주 멀쩡하게, 반듯하게 일어나셔서는, 나한테 가까이 오라고 하시고는 귓속말을 하셨어
'내가 너 장개; 가는 자리는 가보고 죽을라고,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거여'
라고....
오늘 고객 회의가 있어서 야탑에 갔었어
긴 회의가 끝나고 나오니까, 밖엔 눈이 오더라
근데 왜 할머니 생각이 났었을까?
갑자기 우리 할머니가, 여기서 차로 쪼금만 더 들어가면 계신데.... 잠깐 짬내서 가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담배 한 대 피는 도중에 바로 접었어....
우리 할머니는,
나를 보는 그 순간, 다시 기억이 돌아오실테고
니가 뭐가 모자라서 아직도 장개; 못갔냐고 하실테고,
난,
그런 할머니를 보는 그 순간,
저 전에 말씀드렸던, 세상 사람들이 다 반대하는 그 어린애랑 아무도 모르게 둘이 지금 같이 살고있어요....
아직도 너무너무 힘들고 도망치고 싶지만,
그래도 전 그 아이를 사랑해서 행복해요
라고 말해버릴 거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