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나 오래 전 일이다.

 

지금처럼 mp3p가 저가로 보급되기 전이던 그때는,

 

md던가.. 하는 것과, mp3p와 씨디피가 주종을 이루던 시기였던 걸로 기억된다.

 

 

그 사람은 이미 아무도 잘 들고다니지 않는 워크맨을 가지고 다녔다.

 

쉽게 컴퓨터에서 씨디를 구워 듣고 다닐 수 있을, 그런 때였는데

 

그는 밤이면 워크맨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을 녹음했고 길을 걸을때마다 종종 꺼내 들었다.

 

 

2년 이상을 '아는 오빠'와 '아는 동생'으로 이미 지내 온 후였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우리는 이성의 감정을 가지게 된 건지 모르겠다.

 

다만, 나를 좋아한다는 그의 눈치에 나는

 

'나도 사실은 전부터 오빠를 좋아했어요..'라는 식의 뻥을 가미해 나의 마음을 비쳤다.

 

 

 

 

그렇게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정말 흔들리는 팔에 손끝만 스쳐도 가슴이 미칠듯이 두근거리고,

 

집앞에서 내 볼에 살짝 뽀뽀해주던 그 사람때문에 하늘을 나는 것 같았던 그 때.

 

 

버스였던걸로 기억한다.

 

우리는 2인 좌석에 나란히 앉았고,

 

그는 언제나처럼 워크맨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몇년이 지났는지도 모를 꽤나 낡은 테잎을 재생시키고 한쪽 이어폰을 내 귀에 꽂았다.

 

 

 

유희열의 음악도시.

 

고등학교때 즐겨들었던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와! 나도 옛날에 이거 진짜 많이 들었는데.. 자기 전에 꼭 틀어놓고 잤어요. 오빠도 이거 좋아했어요?"

 

서로에 대해 막 알아가기 시작하던 그 때, 사소한 공통점에도 마냥 신기하고 기분 좋았던 때에,

 

우리는 버스에 앉아 가만히 라디오를 들었다.

 

 

 

...안타깝게도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워크맨에서 흘러나오던 유희열의 목소리는 분명 내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기억난다.

 

고등학교때, 종종 그 프로그램에 편지를 보내곤 했었는데..

 

당시 그 프로그램의 주 청취층은 20대 이상이었던 터라, 내 편지는 도통 읽어주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내 편지를 읽어줬던 그 날.

 

너무 신이나서 잠도 못자면서 밤새 기뻐했던 기억이 똑똑히 난다.

 

 

 

 

그리고 5년이 흐른 어느 날,

 

이제 막 좋아하기 시작한 그 사람이, 날 알기도 몇년 전에 녹음했던 그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내 이름과 내 편지가 읽혀지는 걸 다시 듣게 된 것이었다.

 

한국 사람 절반이상은 '좋아한다'고 대답 할 떡볶이를 우리 둘 다 좋아한다며

 

어쩜 우리는 이런 공통점까지 가지고 있을까.. 라며 마냥 설레어하던 그 때에,

 

마치 장난처럼 그의 워크맨에서 흘러나왔던 내 이름.

 

 

 

fate, destiny, soul mate.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며, 어울리지도 않는 쿨한척을 하던 그 어린 시절.

 

나는 그 순간만큼은 '이건 정말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세상엔 정해진 내 짝이 있는 건 아닐까.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은 아닐까.

 

 

 

 

 

 

그렇게 몇년을 보냈다.

 

연애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힘들고, 외롭고, 괴로웠다.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싸웠고, 통화할 때 마다 나는 울었다.

 

힘들어 미치겠다고, 오빠때문에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냐고

 

나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그 사람을 원망해댔지만 몇년동안을 헤어지지 못했다.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힘들지도 않을 거라는 말도 안되는 자기 최면을 걸며

 

힘들어도, 마음이 아파도 꾹 참고 계속 그를 만났다. 그렇게 몇년을 만났다.

 

그렇게 아파도 내가 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연애 초기의 설렘. 그 행복했던 기억들.

 

미친듯이 보고싶던, 일주일만 못봐도 시름시름 앓을 정도로 미치도록 그리워했던 그 시절.

 

그 때의 그 사람, 그 사람의 손, 눈웃음, 밥 먹을때 참 예쁘게 오물거리던 그 두터운 입술.

 

그 기억들이 '과거'가 된다는 생각만 하면 견딜수가 없어서

 

그 사람을 만나며 아프고, 힘들어도 계속 참았다. 참아댔다.

 

 

 

 

시간이 흐르며, 나도 나이를 먹고,

 

언제부턴가 그 모든게 '과거'가 된다 해도 덤덤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모든 기억들은 이제 내겐 과거가 됐다.

 

그 사람을 생각해도 딱 참을 수 있을만큼만 가슴이 쓰리다.

 

만나오며 그렇게도 힘들었는데, 헤어지는 건 거짓말처럼 쉬웠다.

 

만나는 동안 흘렸던 눈물의 몇배는 쏟을 줄 알았지만 거짓말처럼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바보같은 연애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다.

 

그리고 '도대체 왜 못헤어지는거야?' 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도 많이 받아왔다.

 

그때마다 나는 힘들다고, 헤어지는 건 너무 아프다고 그렇게 어리광처럼 징징댔지만,

 

오늘 문득 느꼈다.

 

 

누군가를 보며 나도 이젠 '도대체 왜 헤어지지 못하는거야?' 라며,

 

바보같은 연애를 놓지 못하는 누군가를 보며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말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내 상처는 금세 아물어버린 것 같다.

 

 

 

왜 그렇게 바보처럼 끊어버리지 못했을까 수십번을 후회도 해 봤지만,

 

그래도

 

버스안에서 그 사람과 워크맨을 들었을 때, 그 기분을 생각하면

 

평생 살며 간직할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좋은 기억 하나가 내게 남겨진 것 같아서

 

이젠 아무런 불만도 불평도 미련도 없다.

 

 

 

버스에 멍하니 앉아 지나간 사람을 생각했을 때,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 있다면, 이건 정말 그 사람을 잊었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