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꿈에는 굉장히 오랫만에 기억의 저편에서 살아 돌아온 이가 나왔다. 분명 나는 그의 얼굴을 모

 

르는데 꿈에서는 눈 코 입을 다 가지고 있더란 말이지. 근데도 그 얼굴을 분명 그 녀석이라고 생각해버

 

렸다. 음. 꿈에서 본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때는 바야흐로 갓 고등학교에 들어갔던 시절이었다. 하이텔이 서비스를 시작하고 통신서비

 

스들이 생겨나 경쟁이 시작되었던 그 때, 띠이- 하는 소리와 함께 통신에 접속하고 있으면 전화가 통화

 

중이어서 부모님이 얼른 접속 끊으라고 재촉하던 그 때.

 

 

아버지 이름으로 하이텔에 가입되어 있었고 나는 아버지 아이디로 남자라는 착각을 받으며 간간히 또

 

래들과의 채팅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암튼 그렇게 채팅방에서 자주 만나는 애들이 자연스레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고 암묵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접속하면 늘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주로 서울에 사는 애들이었고, 나와 몇몇 애들만 지방에 거주 중. 그들 중 두명의 동갑내기들이랑 굉장

 

히 친했는데 아직까지 이름과 아이디까지 정확히 기억난다. 

 

 

한 녀석은 S고에 다니던 녀석으로 좀 특이한 애였다. 소원은 바람이 불면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 혹

 

은 두 손가락으로 머리를 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었고 - 그 S고는 정말 악명높더라 - 독특하고 재밌는

 

아버지를 둔 덕에 해마다 방학이면 중학생 동생을 데리고 둘이서 전국 배낭여행을 다녔다. 고등학교 2

 

학년 여름방학엔가 그 녀석들이 남도를 돌아 올라오는 길에 대전에 들렀을 때는 돈이 없어 어제 저녁

 

과 아침을 굶었으니 나를 어엿비 여겨 밥을 사달라는 난데없는 전화에 불려나가 없는 용돈 쪼개어 햄

 

버거를 사주기도 했다. 그 녀석은 내가 굉장히 작다며 신기해했고, 나는 너처럼 얼굴에 점 많은 녀석은

 

처음 본다며 깔깔댔다. 음, 아마도 그것이 온라인으로 알게 된 사람의 외모에 대한 과도한 상상과 기대

 

는 금물이라는 것을 일깨워준 첫번째 만남이었을거야. 어쨌든 귀여운 녀석이었다. 그 녀석은 잘 사고

 

있으려나. 지금 뭐하고 있으려나. 


 

그리고 다른 한 녀석은 거의 남자친구나 다름 없었다. 채팅하다가도 지금 집으로 전화할테니까 통신

 

끊어 라며 굳이 채팅으로 해도 될 얘기 목소리 듣겠다고 비싼 시외전화도 많이 했고, 생일이면 꽃을 보

 

냈다. 나도 그 애 생일에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을 정도로 굉장히 소녀다운 선물을 보냈던 것 같다. 암튼

 

그 녀석에게 받은 꽃이 내 생애 최초의 장미꽃 선물이었고 - 졸업식, 입학식 이런건 빼자 - 그 꽃은 잘

 

말려져 거울위에 걸려있었지. 어쩜, 풋풋했구나.

 

 

디카도 스캐너도 웹캠도 없었던 그 때라 - 지금이면 쉽게 사진이라도 교환해서 얼굴 확인이라도 하겠

 

지만 - 오로지 파란 화면에 뜨는 하얀 문자로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지냈다. 기억나지 않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어제 본 영화 이야기며 요즘 읽는 책과 지긋지긋한 교복과 재수없는 선생님들의

 

험담과 진로와 꿈들.

 

 

그 애를 상상하는 일은 즐겁고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그 당시 어린 나이에 대전과 서울이라는 거리는

 

무척이나 멀고도 먼 거리여서 내가 서울에 올라가거나 그가 대전에 내려와 만난다는 것은 아예 상상조

 

차 하지 못했고 그저 그애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내 이야기들을 뒤섞어 내 멋대로 '바르고 귀여운 남

 

자친구' 의 존재로 만들었던 것 같다. 그 애도 마찬가지고. 좋지 않은가. 그때만해도 고등학생이 연애를

 

한다는 것은 곧 '날나리'임을 뜻하였고, '연애=성적하락=인생파탄'의 공식이 진실처럼 공기를 떠돌던

 

때였다. 그러니 블루 모니터상의 남자친구란 여고생의 연애에 대한 동경과 현실적 제약 사이의 적절한

 

타협점이 될만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2년동안 파란 화면 위에서 0과 1의 데이트를 했다. 

 

 

그러다가 고3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고2의 겨울방학. 우리는 채팅을 그만 두었다. 공부를 해야하니

 

까 라는 명목으로 '대학가서 다시 연락하자' 는 - 지금 들으면 소가 웃을 낡아빠진 대사지만 그때는 무

 

척이나 아쉽고 진지했던 하얀 텍스트가 마지막이었다. 통신상의 친구들은 그렇게 고3을 맞이하고 각자

 

의 도시에서 통신을 금지하고 책상을 파고들었다. 그 아이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 민군과의 마

 

지막 통신은 95년의 설날이었을거다. 복 많이 받으라는 얘기와 1년동안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메세지

 

가 오갔겠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리고 정말 공부만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는 참으로 독한년이어서 지금 다시 하라면 도저히 못

 

할 기세로 공부했다. 가끔 민군이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서울

 

에 올라가면 만날 일이 있겠지란 기대감으로 생각을 접었다. 설날의 채팅이 마지막일 것을 알았다면

 

전화라도 한번 해볼 수 있었겠지만 뭐 몰랐으니 공부에만 매달려 그렇게 1년을 보냈다.

 

지긋한 일년은 금새 지나가 나는 특차로 남들보다 빨리 대학 합격통지를 받았고 그 이후 두달은 정말

 

만고땡 룰루랄라 삐빠빠룰라 인생이었다. 민군 생각도 했었지만 일년만에 다시 하이텔에 접속해도 민

 

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아직 수험생 생활이 끝나지 않았을 시점이라 전화하기도 좀 그렇고 무엇

 

보다 그 동안 못놀았던 것을 보상받기 위한 작업들에 너무 매진해있었던 터라 솔직히 잊고 있었다. 그

 

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놀다가 들어왔더니 엄마가 '민군한테 전화왔었다' 그러시는 거라. 

 

우아, 이 자식 나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살짝 감동했다. 뭐라 그랬어? 민군은 K대에 합격했다는 소식

 

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내가 Y대에 합격하여 서울로 상경할 것을 알려주었다고 했다. 다시 전화할께요

 

하고 끊었다는데.

 

 

그 이후로 일주일정도 나는 민군의 전화를 기다렸다. 기다리다 못해 민군의 집에 전화를 걸기도 했는

 

데 그때마다 그는 집에 없었다. 엄마는 혹시 내가 그 애보다 좋은 대학에 가서 그것이 부담스러운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내놓았는데, 좋은 대학이 인생을 결정한다고 믿고있었던 그 당시로는 어느 정도

 

납득할만한 추측이기도 했다. 어린 우리들은 소심하고 여렸고 어리석었다. 


 

그게 마지막 소식이었다. 서울로 올라와 어리둥절한 낯선 생활에 적응하랴, 학교에 적응하랴 친구 사

 

귀랴 술마시고 놀랴(이게 주된 원인이었지만) 민군을 찾는데 쏟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새로이 유니텔

 

에 아이디를 만들었고 다른 새로운 통신 친구들도 잔뜩 생겼다. 점점 그 친구는 잊혀져갔다. 

 

그리고 아이러브스쿨 이라는 반짝 사이트가 떴을 때, 그의 학교 사이트를 통해서 그가 군대에 갔다는

 

소식을 엿봤고 싸이월드가 한참 유행일 때 그의 홈피를 찾아봤지만 민군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

 

었다.


 

덕분에 그의 얼굴은 아직까지 미스테리다. 그리고 또 그 덕분에 나는 십삼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를 간

 

간히 생각한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결혼해서 애낳고 잘 살고 있을지도. 

 

어제 꿈에 민군과 나는 파스타를 나눠먹으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명 얼굴이 있었는데 잠에

 

서 깨어나는 순간 그 얼굴은 역시 또 백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얼굴없는 나의 첫 남자친구. 꿈에서 반가웠다네. 아마도 영원히 얼굴이 없는 채로 남겠지. 

 

추억만 갈무리 되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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