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이나 같이 먹자."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나는 알겠다고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하늘은 파랗다못해 창백해보였고 그 하늘 아래
거리를 걷는 모든 사람들의 입에선 비명처럼 하얀 입김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뉴스에서 올 겨울 들어 가장 춥다고 했던 날이었다.
19살에 상고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하셔 올해 64세. 친구들은 다 퇴직하고 손자 손녀랑 친구를 먹어가며 재롱을 떠는 그 나이에 우리
아버지는 아직 회사원이시다. 전무라는 직함을 달고 있긴 하지만 직원 열명 남짓한 회사에서 전무는 중역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저 사장이 마흔도 채 되지 않은 자기 아들이 못미더워 세워논 경비원 역할을 하는 직장인에 불과한 것이다.
삼백이 채 안되는 월급도 잘못 선 보증 탓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절반을 차압 당하는 상태였다.
아버지 친구들은 능력있는 놈이다, 운 좋은 놈이다 하며 그나마 벌이가 있는 우리 아버지가 사주는 술을 낼름낼름 받아먹으
며 사탕발린 똥까시를 해대지만 아버지가 그 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안다.
"19살에 시작해 공휴일 일요일 빼고는 늘 회사였다. 휴가도 일년에 이틀이 전부였어. 나도 이젠 좀 쉬어봤으면 좋겠다."
좀 과장해서 근 50년이다. 1년 남짓 다닌 회사를 때려치운 아들을 둔, 50년 동안 양복을 입고 아침마다 출근을 하시는 울 아버지가 얼마
전 술에 취해 혼잣말인듯 내뱉은 대사였다.
"뭐 먹고 싶냐?"
어릴 때 아버지랑 극장엘 자주 갔었다. 록키, 람보, 영구와 땡칠이, 우뢰매, 공작왕...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보기 싫은 영화들도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영화가 끝나면 꼭 중국집에서 짜장면에 군만두를 시켜먹었다. 늘 홀수로 나오는 군만두 때문에 나는 몰래 갯수를 헤아려
가며 먹었는데 언제나 아버지는 두 개 이상을 드시지 않으셨다. 얼마전에 올드보이를 티비에서 다시 보다가 최민식이 군만두를 먹는 장
면에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나같으면 15년이 아니라 30년도 있겠구만.'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군만두였던 것이다.
"짜장면이랑 군만두...어떠세요?"
점심시간이라 손님이 많았다. 간장을 따르고 고추가루를 뿌리고 젓가락을 갈랐다. 물과 단무지, 양파가 나왔고 뒤이어 짜장면과 군만두
가 나왔다. 짜장면을 비비고 만두를 집고 단무지를 씹었다. 15분 정도의 식사 시간 동안 아버지는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는 오늘도 군만두를 두 개만 드셨다.
"경주물산이라고...내 선배가 하는 회사가 하나 있는데..."
중국집 바로 옆 카페에 들어와 커피를 시키고 마주 앉아 이십분쯤이나 흘렀을까. 커피가 미지근해졌을 때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네가 이런 거 싫어하는 거 알고 있는데...그래도..."
나이 서른 둘에 백수로 지내는 아들에게 환갑이 넘어서도 직장을 다니시며 가장 역할을 하시는 아버지가 어렵고 힘들게, 심지어
미안해하시며 입을 여신게 아들 일자리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네가 꿈을 이룰 거라고 믿고 있지만... 나도 이제 곧 퇴직하면 그 때는 부탁하려고 해도 말빨도 안먹힐 거고... 너도 나이가..."
사장 포함 5명이 근무하는 작은 합판회사라고 했다. 월급은 160 만원 정도지만 알짜회사라 오래 다닐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지금 당장 결정하라고 하는 건 아니고..."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이야기를 듣는 내 모습에 아버지는 점점 목소리가 작아져갔다. 마치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죄를 고백하는 피의자
마냥.
"아버지, 저 할게요. 부탁드려봐 주세요."
불쑥 내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왔다. 아버지는 놀란 듯 나를 바라봤다. 아버지의 눈은 깊었고 그 눈에 비친 나는 너무나도 얕고 작고 볼품
없었다. 나는 아버지 눈을 바라볼 수가 없어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곳엔, 아버지 주름이 있었다. 다시 시선을 옮긴 곳엔 검버섯이, 그
다음엔 하얗게 센 머리칼이, 그 다음엔 회사로고가 수놓인 작업복 점퍼가, 굽은 등이, 낡은 구두가 있었다. 낡은 구두가 서리가 낀듯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애꿎은 커피 잔을 들어올렸지만 커피는 한 모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들어가 볼게. 나중에 집에서 보자. 그리고 이거..."
카페를 나와 다시 회사로 돌아가시려던 아버지가 내 코트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남자는 그래도 돈이 좀 있어야지."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서둘러 횡단보도를 건너고 계셨다. 낡은 구두 한켤레에 허름한 작업복과 굽은 등이, 그리고 하얀
머리칼이 올라탄 채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서 꺼내든 만원짜리 다섯장을 바라보며 그저 멍하니 숨을
쉬고 있을 뿐이었다. 입에서 새 하얀 입김이 한숨처럼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올해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