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페미니즘과 성재기
성재기가 죽었다고 하네.. 개인적으로 참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사건이야.. 소중한 인명이 그렇게 떠났다는 점도 그러하지만 과연 그이가 내 건 기치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만큼 가치가 있고 온건했는가라는 점에 있어서도 아쉬움이 느껴져.
진중권이 성재기나 남성연대에 관련해 남긴 트윗이 펌피럽에 올라왔는데, 그와 관련한 논쟁들에 관해서 짤막한 글을 하나 남겨볼까해. 주로 다룰 부분은 진중권이 말한 사회구조 인식의 타당성과, 약자가 행하는 더한 약자에 대한 폭력이야.
나처럼 30대 전후의 나이대의 사람이라면 1992년 미국 LA에서 발생한 흑인폭동을 기억할거야. 사건의 전말은 과속운전 한 흑인 청년을 백인 경찰 넷이 집단폭행 했는데, 이 폭행이 법정서 만장일치로 무죄 판결이 나오고, 이에 격분한 흑인들이 시위와 폭동을 일으키게 된거야. 때마침 한인 슈퍼마켓에서 두순자라는 아줌마가 흑인 애한테 두들겨 맞다가 총을 쐈는데 이걸 방송에서 폭행장면은 잘라내고 총쏘는 장면만 보도해서 흑인들의 분노를 조장하고 흑인들이 대규모로 한인타운을 침공해 코리아타운의 90%가 파괴되고 20년전 기준으로 3억 5천만 달러의 재산 피해가 발생한 사건이야.
이 사건을 보고 어떤이는 이런 쓰벌 깜디새끼들 왜 백인한테 쳐맞고 우리한테 와서 지랄이야라고 반응할거고 어떤이는 와 흑형이 역시 물건도 크고 함부로 건들었다 좆되는구나..이러겠지.. 하지만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따로있어. 첫 번째는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가서 화풀이한다고, 사회적 약자인 흑인들이 자신들이 받은 인종차별의 설움을 더한 약자인 여타 유색인종(여기선 한국인)들에게 풀었다라는 점이며 두 번째는 그 과정에서 LA지방정부의 정보조작(선행한 폭행에 대한 한국인 아줌마의 정당방위임에도 총쏘는 장면만 보도)이 이 어마어마한 사태를 조장했다는 점이야.
진중권이 트윗에서 지적하고 있는 점이 바로 이런 맥락인거 같아. 즉 사회적으로 해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특정인(위의 경우 백인)들에 의해 남자건 여자건 외국인 노동자건 모두 약자의 입장에 처해있으며, 이 구조를 타파하지 못하면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데, 그 약자들 중에서도 강자인 ‘약한남자’(이 경우 흑인)들이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보다 더 약한자들(이 경우 한국인)에게 분풀이를 하고있다는 거야. 정확하게 진중권이 이 약한남자들의 행태를 대변하는 것이 남성연대라고 지적하는건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보고있고, 그것이 남성연대나 성재기의 한계라고 생각해.
위의 LA사태와 한국의 현상황을 비교해 보면 좀 명확해지지. LA사태에서 관련 계층의 층위를 보면 백인-흑인-여타유색인(한국인)으로 나눠볼 수있는데, 최 상위계층인 백인들은 지속적인 인종차별로 흑인들을 억압하고 자극해 오다가 막상 흑인들의 폭동이 벌어지자 정보조작을 통해 그 분노의 방향성을 또다른 약자인 한국인에게로 돌리고 있어. 결국 애먼 한국인들만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고 말았던거야. 폭동 이후 한 흑인이 인터뷰한 것을 방송으로 봤던 기억이 있는데, 그 흑인은 한국인들이 들어와서 독하게 장사해서 지역내 모든 돈을 가져가 버리고 그로인해 나는 빈곤하고 일자리도 구할 수가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던거 같아.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흑인들은 자신들을 아주 긴 시간동안 지배하고 노예로 삼아왔던 백인들의 폭력에는 감히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자신보다 더한 약자이자 이민자인 한국인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한것에 불과하지. 그 폭력을 어떤 의미에선 지배계층이며 어떤 의미에선 가해계층인 백인들은 묵인하고 더나아가 조장했던거고.
그런데 저 흑인의 인터뷰 뭔가 상당히 익숙하지 않아?? 요즘 우리 방송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장면들이야. 몸값이 싼 짱깨새끼들과 동남아 노동자들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우리 한국인이 설자리가 없고 우리는 실업에 시달리며 점점 더 빈곤해져간다는 주장들 말이지. 그런데 노동인력 사용의 유연성 이런걸 주장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들여오는 정책을 펴도록 한것은 대기업을 비롯한 한국의 기득권 세력층이거든. 싸고 말잘듣고 휴가도 안쓰고 돈만주면 야간근무도 마다하지 않는 외노들을 써서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 싶은 심리로,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으로 인한 한국 내 치안상 불안정성 증가나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문제, 일자리의 감소로 인한 실업률의 증가와 같은 사안들은 깡그리 무시해버린거지. 그 문제점들을 일반인들이 인식할 때 쯤 됐을때는 한국 산업시장이 외국인 노동자 없이는 돌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어.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가한다면 저 당시의 흑인들이 보이는 행태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거지. 결국 원인 제공은 싼값에 노동력을 공급받기 위한 자본가층이 제공했는데(만성적인 백인의 흑인 차별과 억압), 그로인해 발생한 고단하고 힘든 자신의 삶, 실업에 대한 원망과 분풀이를 또다른 약자인 외국인노동자들에게 행하고 있는거야.(한국인에 대한 폭력)
결국 외노의 유입으로 자본층이 모든 이득을 가져가고, 그로인해 발생한 사회적 혼란과 일자리부족에 대한 책임을 지거나 대책을 내 놓지도 않는데, 이들에 대해 분노해야할 대부분의 일용직 노동자들은 삼성이 망하면 한국이 망할줄 알고 벌벌 떨고있지. 그런데 한국에 와서 열심히 일만하면 돈벌수 있다는 말에 타향만리 와서 고생하는 외국인노동자들이 20년전 LA에 가서 슈퍼마켓 하던 한국인과 다를점이 무엇이며 그들이 잘못한건 뭐냐는거지.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일자리가 점점 감소하는 추세에서 개인의 노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거야. 진중권은 이것에 대해서 사회성원이 전부 천재라 하더라도 실업률이 5%라면 누군가는 실업자가 돼야한단 말로 표현하고있지. 결국 남성연대가 이 건에 관해서 공격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외국인 노동자가 제공하는 저렴한 노동력의 단물만 빨아먹은 기업들이나 제대로된 완충장치를 마련하지 않고 외노들이 들어올수 있도록 관계법령을 만들어서 기업들에 이득을 안겨준 정부로 활시위를 옮겨야한다는거야.
그러면 글의 제목이 흑인 페미니즘과 성재기이니 흑인 페미니즘 이야기를 좀 해야겠네.
뜬금없는 흑인 페미니즘을 들고온 이유는 그것이 흑인 + 여성이라는 복합적인 약자를 다루고 있다는 이유에서가 그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사회적 약자인 남성’의 분노의 타겟이 외국인 노동자나 여성에게 향해있는데, 외노에 대한 분노가 옳지 않다면, 여성에 대한 분노의 실체는 어떤것이며 과연 의미가 있는것인지 살펴보기 위해서야.
페미니즘이라는 것을 단순히 여성주의 뭐 이런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페미니즘이 그렇게 단순한것은 아닌듯해. 페미니즘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나 운동가, 학자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입장에 의해서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는거야.
아 물론 페미니즘을 공부하자는건 아니니까 간단히 할이야기만 하자면, 전 세계적으로 페미니즘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움직임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며, 한국 페미니즘의 주류도 역시 이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라고 볼 수 있어. 이 분류의 특성을 좀 러프하게 설명하자면 ‘나 이대나온 여자야’라는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거 같다. 그래 맞아 나를 포함해서 많은 남성들이 졸라 싫어하는 그 페미니즘이 그거야. 개인적으로 봤을대도 여성부는 문제가 상당히 많아. 물론 자유주의 페미니즘 자체가 주장하는 여성 개인의 자율성과 자아실현이라는 기치가 틀렸다는건 아니야. 그러나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특성은 기존의 사회적 틀을 인정한 채 그 안에 여성의 입장이 반영되도록 구조를 개량하는 것을 주로하기 때문에 문제점이 있는것이지. 또한 그 범위를 부르주아 백인여성을 대상으로 국한하고 있고 남성적 가치의 우월성을 인정한다는 것도 문제점 중의 하나야.(한국인 중엔 백인이 없으니까 먹고 살만한 우아한 여성으로 수정할수 있겠지) 여성부가 여성의 권익신장과 남녀평등, 페미니즘을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장자연의 죽음에 관해서나 성매매 여성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점 때문인거 같아. 좀 심하게 말하면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측면에서 보면 이들은 여성이 아닌거니까. 장자연은 그냥 뜰려고 안달나서 여기저기 몸바치고 다닌 년으로 볼꺼고, 성매매 여성들은 여자망신 다시키고 다니는 썩은 창녀 뭐 이정도로 생각하겠지.
페미니즘이라 하면 모든 여성의 권익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할텐데 왜 이런 괴리가 생기는걸까?? 잠깐 미국의 투표권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물론 흑인에대한 편견은 여전히 존재하고 실질적 흑인 참정권이 원활하게 보장된건 1960년 정도에 이르러서야.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미국에서 법적으로 흑인 남성의 투표권이 처음 보장된 시기는 1870년즈음인데 반해 미국에서 백인 여성이 투표권을 갖게된 시기가 1920년이라는 점이야. 민주주의의 상징인 프랑스가 1944년에 여성 투표권을 인정했고 스위스가 1971년에 인정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과히 이상한 일도 아니지. 그런데 그 당시의 시각으로 노예에 불과했던 흑인 남성의 투표권보다 백인 여성의 투표권 획득이 늦었다는 첨은 참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지. 그런데 더 우스운건 백인 여성의 투표권이 1920년즈음 인정된 반면 흑인 여성의 투표권은 1965년 쯤에 인정이 돼. 1920년대 당시의 상황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투표권 획득을 위해 인종 무관한 연대를 통해 같이 여성의 투표권 획득을 주장하다가 쇼부 끝에 좋다 흑인여성은 배제하고 백인 여성 투표권만이라도 인정해라 이렇게 간거야. 물론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 하지만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에게 흑인은 여성이 아니었던거지. 그냥 천박한 흑인이었을 뿐이야. 또한 여기서 하나의 주지할 점은 흑인/백인/남성/여성이란 요소들이 여러가지 조합으로 다양한 역학관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는 점이야. 흑인 남성은 사회적으로는 백인 여성의 노예였을지 모르나 형식적으로는 백인 여성보다 먼저 투표권을 얻은 상위계층이었던거지. 권력관계의 문제는 이처럼 단순한 흑백논리나 일차원적 사고로 접근하기엔 난해한 점이 많아.
아무튼 이런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행태는 동물 생명의 존엄을 주장하면서 개는 우리의 친구이지만 소고기는 마블링이 좋은것이 좋다는 식의 사고를 가진 동물 애호가들에게서도 발견이 돼. 나는 차라리 생명의 존엄을 주장한다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채소는 먹지만 동물은 먹지않겠다는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겠어. 왜 개는 우리의 친구이면서 달팽이는 우리의 친구가 아닌거야?? ㅋㅋ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아 왜 백인여성은 여성이면서 흑인여성은 여성이 아니니?? 아무튼 위에 기술한대로 한국에 현재 주류 페미니즘이란 가진자들의 페미니즘, 소위말해 이대나온 여자들을 위한 페미니즘일 뿐이야. 근데 이건 여성이긴 하지만 자본과 권력을 가진자들의 페미니즘인거지. 좀 더 나가서 기술하면, 여기서 페미니즘은 ‘가진여성의 권익을 보장하기위한 학문적, 이론적 근거’일 뿐으로 페미니즘이 무슨일을 한것이 아니라 권력이 페미니즘의 옷을 입었다고봐야돼.
남성연대의 사고의 한계란 페미니즘으로 인해 남성들이 고통받고 있는게 아니라 ‘자본과 권력을 가진’ 여성들에 의해 역차별이 행해지고 그것에 의해 남성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점이야. 즉 돈과 권력에 진거지 여자한테 진게 아니란 말이지. 그런데 어떻게 모든 여성이 남성연대의 적이 될수 있을까.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 백승이라 했는데 적이 정확하게 뭔지를 파악하지 못하니 변죽이나 울리고 뻘소리나 하는 찌질남들 집합소란 소릴 듣는거야. 페미니즘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고, 이러한 페미니즘 중에서 한국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페미니즘이란 어떤것이며, 그 이면에 있는 권력의 실체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선행돼야해.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첨성대를 지어 천문에 관한 지식을 백성들과 공유하려 하는 선덕여왕에게 미실이 말한 유명한 대사를 하나 소개할게. ‘ 세상에는 수평적 관계도 존재하지만 수직적 관계도 존재한다. 수평적 관계에서 보았을때 공주와 나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이지만 수직적 관계에서 보면 공주와 나는 지배계층이고 백성들은 피지배계층이다. 피지배계층에게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것은 지배체계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라는 대사야. 흑백논리와 종북논란, 양비론으로 가득한 현대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 대사인거 같아. 남성연대의 사고가 매우 일차원적이라는 것은, 관계와 사회구조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역차별로 고통을 주니 여성이 남성의 적이며, 일자리를 뺏어가니 외노는 남성의 적이라는 식의 단순한 이해구조를 갖고있기 때문이야. 즉 수평적인 대립구조만을 파악하고 그 이면에 있는 수직적 관계의 측면을 간과하고 있는것이지.
외노문제에 있어서도 위에 지적했지만, 저렴한 노동력으로 더 많은 이득을 창출해 내고자 하는 욕심에 눈이 멀어 과도한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초래할 한국 사회의 혼란은 무시해버린(간과한게 아니라 무시한거야..) 자본층이 있고, 여성문제에 있어서도 페미니즘이란 이론과 학문을 자신들의 권익 보호만을 위해 유용한 기득권 여성층이 있어. 이건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 관계의 시각으로 보아야 파악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이지. 진중권이 지적하는 점이 바로 이점이야. 민주주의 자유주의 하지만 현대는 자본에 의해 묶여있는 계급사회일 뿐이야. 그들이 준 한도 내에서만 민주와 자유가 허용되는거야.
진중권은 ‘연대’를 이야기 했어. 수평적으로 보면 적으로 보이는 계층들이 사실은 수직적 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모두 자본에 의해 종속된 같은 계급이라는 인식을 공유해야된다는거지. 사회적 약자인 여성, 사회적 약자인 남성, 사회적 약자인 외국인 노동자 모두가 수직적 관계에서 보았을때 자본에 의한 하위계층으로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자본을 틀어쥔 상위 계층에게서 조금씩 조금씩 더 가져와야된다는거야. 그것이 연대지. 정치.. 연대.. 과연 거창하고 어렵기만 한 단어일까.. 그냥 내 권익을 좀 더 가져오기 위해 행할 수 있는 수단일 뿐이야.
성재기의 죽음.. 문두에 밝힌대로 참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하지만 결국 남성 문제에 대한 철저한 고민이 없이 남자의 권익을 위한다는 말에 찬동하는 남자들의 칭송에 취해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다가 귀한 생명 하나 날려버린일 그 이상도 이하도아니라고 생각해. 이미 고인이 됐지만 그리고 미숙했지만 성재기씨의 죽음이 그나마 값진것이 되려면 남성연대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좀더 폭넓고 다양한 시각으로 균형을 갖고 접근해서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제대로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집단이 되어야해.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대한민국 어르신 연합에 대항하는 대한민국 자녀연합(대자연)처럼 그냥 촌철살인의 위트가 담긴 포스터나 제작하는 단체로 머물렀어야지..
그리고.. 한국 국민은 LA 사태에서 흑인에게 폭행당하는 두순자 아줌마의 장면은 삭제하고 흑인에게 총을 쏘는 장면만으로 각색하여 방영한 LA지방정부같은 일을 한국 사회에서도 자행하고 있는 그런 집단이 어딘지, 뭘 위해서 그런짓들을 하고있는지 유심히 감시해야해. 그들은 그들로 향할 활시위가 외국인 노동자, 혹은 종북세력이라고 낙인찍은 애먼 사람들에게로 늘상 향해있길 바랄테니까. 피지배계층에게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것은 지배체계를 무너뜨릴 뿐이라 생각한 미실처럼..
'당신이 외노자들 하는짓을 못봐서 그런다'같은 글을 볼 때마다 참 거시기 했는데 깔끔하네요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