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선생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꿈이 뭐냐고.
대통령과 과학자, 선생님 같은 직업들이 하나씩 아이들의 입에서 나와 열거 되었다.
그리고 난,
"외교관이요."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늘 내가 외교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잖아. 비행기도 마음대로 탈 수 있고."
1981년.
해외여행이라는 개념이 없어
아무나 쉽게 비행기를 타지 못 하던 시절이었다.
"나중에 외교관 되면 엄마 꼭 비행기 태워줘야 돼?"
엄마는 비행기를 타고 싶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보증을 서는 바람에 생겨버린 어마어마한 빚.
그 당시 엄마는 거의 매일 울었고,
아빠는 그런 엄마에게 청승맞다며 매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난
청승가족의 끝을 보여주는 것처럼
몽유병이 생겼다.
아빠가 가스렌지에 불을 붙이는 시늉을 하면서
그냥 다 같이 죽어버리자고 소리를 지른 날은
대문을 열고 나가 골목길 끝으로 뛰었다고 한다.
엄마가 부르는 내 이름 소리에 잠시 잠이 깼고
잠시나마 콘크리트 전봇대 끝에 매달린 전등과
삼천리 연탄 가게 간판이 보였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기억의 장면은 떠올릴 때마다 3인칭이다.
항상 내가 어린 시절의 나를 저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7살이었기 때문에
난 외교관이 뭔지 몰랐다.
엄마는 계몽사 위인전에 나오는 서희 정승 같은 직업이라고 얘기해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당시 내 꿈은
"엄마가 도망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뿐이었다
7살의 꿈 치고는 너무 처량하지만
동네 아주머니들의 수근거림은 아이의 귀에도 들렸다.
"애가 있는데 설마 버리고 도망이야 가겠어?"
그리고, 그 날은 유치원에서 돌아왔는데
엄마가 없었다.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엄마는 나오지 않았다.
난 엄마가 드디어 날 버리고 도망갔다고 생각했고
대문 앞에 앉아 엄마를 부르며 통곡했다.
앞집과 옆집 아줌마들이 어린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듣고 나와
무슨 일인지를 묻고,
애 엄마 어디 가는 거 본 적 있냐는 정보를 주고 받고,
아빠한테 연락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을 할 때까지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30분 정도가 지나서 엄마는
양 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채소 가격이 싸다는 소리에
1시간을 걸어 미아리 방천시장에 다녀왔다고 했다.
엄마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나를
지하실 아궁이 옆으로 데려가 물을 데운 후 씻겨줬다.
"엄마, 나 버리고 가지마. 엉엉~"
난 그 때까지 울고 있었고
"우리 예쁜 아들 두고 엄마가 어디가? 엄마 어디 안 가."
엄마는 그 때부터 나를 안고 울었다.
그 때 엄마 나이가 서른 다섯.
지금 내 나이보다 한참 어리다.
남편의 빚과 철부지 아이를 감싸 안아야 했기에
콩나물값 오십원을 위해 1시간을 더 걷고
평생을 아줌마 파마머리로만 살아야 했던
35세의 삶이 어떠했을지는
차마 짐작이 가지 않는다.
나이가 드니
그 때, 날 버리고 도망갔으면
엄마가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행복을 위해 엄마가 많이 불행했던 건 아닐까.
부디, 그런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엄마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런데 너무 빨리, 너무 멀리 가버렸다.
타보고 싶었던 비행기도 한번 못 타보고.
이번 주 일요일,
엄마 돌아가신지 딱 10년이 된다.
평소 좋아하시던 취나물과 감자전 들고 납골당을 찾아가서
외교관이 되지는 못 했지만 씩씩하게 살고 있는 모습 보여주고 와야지.
비행기 못 태워줘서 미안해, 엄마.
누가봐도 보잘 것 없이 평범한 아줌마의 인생이었지만
나에게는 늘 최고였던 엄마의 얘기를 적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