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이던가. 벚꽃은 피었지만, 꽃구경 따위 기대도 할 수 없었던 봄의 이야기다.
당시 나는 세상 물정 모르던 사회초년생으로 서울의 한 출판사에 비서로 취직했다.
이름만 출판사지 책은 뒷전이고 소위 말하는 '찌라시'를 만드는 곳으로,
카달로그, 브로슈어는 물론 '선거 컨설팅'이라는 이름을 달고 선거 홍보물을 제작했다.
나는 비서였기에 현업의 일은 잘 모르지만,
젊어서 부를 쌓고 나이 먹어 명예와 권력까지 욕심내는 새내기 정치인을 상대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인자해 보이게 주름을 지워달라거나 점을 가려달라거나 하는 건 기본이고
잔머리를 없애달라 가르마를 바꿔달라고까지 요구한다는데, 영감탱이야 그건 포토샵이 아니라 빗이 할 일이라고요.
사장은 호구도 그런 호구가 없었다.
선거 홍보물이 잘못 인쇄되어도 인쇄소에 가서 따질 생각을 못하고
"김양, 이거 칼질 좀 해."라며 수천 장의 종이을 매만지게 했으며,
일을 해주고도 돈 달라는 말을 못해 농산물을 대신 받아오고는 했다.
그런 주제에 사장은 허세 부리기 좋아하는 사내였다. 아침을 호텔 사우나에서 시작해 돈 없이 택시를 타고 왔다.
그리고 회사 앞에서 전화를 걸어 "김양, 지갑 가지고 내려와!"라며 비서 있음을 과시했다.
이런 사무실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만무하다. 내 월급은 첫 달부터 밀렸고
'가족 같은 회사'라며 구인 사이트에 자랑하던 사무실은 '가'자 빼고 '족' 같이 변하고 있었다,
가오를 목숨처럼 생각하던 사장은 자신이 어떤 퍼포먼스라도 보여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그날 오후, 진동이 울리며 '사장님'이 떴다. 미적대다 전화를 받자 사장은 호기롭게 소리를 쳤다,
"김양, 카메라랑 녹음기 챙겨서 빨리 내려와!"
1층에 내려가자 택시에서 사장이 김양 여기 타라고 지시했고 난 영문도 모른 채 택시에 탔다.
교외로 한 시간 달려 도착한 곳은 A시,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여전히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카메라와 녹음기가 든 무거운 가방을 든 채 엉거주춤하게 내렸다.
어느 허름한 건물 앞에 서서 사장은 내 목에 카메라와 녹음기를 걸어주며 말했다.
"김양, 이제부터 우리는 회사를 구하러 가는 거야. 조그마한 증거라도 다 잡아!"
그렇다. 그곳은 어느 폭력 조직의 사무실이었다.
'어른의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조폭 두목이 자신의 인생을 세탁한 채 정치에 출마했고
선거 홍보물을 만들어주고 돈을 떼인 사장은 갓 대학 졸업한 비서 하나를 데리고 조폭 소굴에 돈 받으러 온 것이었다.
사장님의 패기에 질린 나는 '전 여기 못 가겠는데요.' 했지만,
사장은 '회사를 위해서 이런 것도 못하냐.'는 둥 입사한 지 보름 된 나에게 회사의 존망을 걸고 패악질을 부렸다.
지금 회사의 존망이 문젠가요. 제가 좆망하게 생겼는데요.
뭐 이러다가 저러다가 나는 결국 목에 DSLR과 녹음기를 걸고 조폭 사무실에 입장하게 됐다.
여차하면 '전 그냥 따라온 떨거지예요! 이 카메라 드릴 테니 때리지 마세요!'하고 사장을 배신해야겠다 생각하며
온갖 상상을 다 하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사장은 입구에 서 있던 똘마니에게 날라차기를 시전했다.
"야! 이 새끼들아! 내 돈 내놔!"
내 키는 163센티고, 사장은 나보다 좀 더 작은 사내였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자 조폭들이 사무실 입구로 모여들었고,
단신의 중년 사내가 악을 지르며 발길질하는 걸 보며 서커스라도 보는 듯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거구의 조폭에게 고목 나무의 매미처럼 매달린 사장은 나에게 소리쳤다.
"김양! 빨리 찍어! 찍어!"
조폭이 경찰을 부르면 우리가 잡혀갈 상황인데 거기다 왜 증거까지 남기려는 건지 알 수가 없지만,
나는 월급의 노예였으므로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그러다 보스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나와 점잖게 타일렀다.
'돈을 안 준 줄 몰랐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난장판은 끝이 났는데, 넥타이며 단추며 다 풀어헤치고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 지르던 사장 옆에서
카메라 들고 있는 내가 왜 그렇게 병신처럼 보이던지, 결국 나는 입사 한 달 만에 사직서를 냈다.
여기서 끝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사장은 내 월급을 보내지 않았고
나는 노동부 방문과 삼자대면이라는 퀘스트를 수행했다.
그러고도 내 손에 들어온 돈은 겨우 월급의 반이었다.
클라이언트에겐 다정하지만 직원에게는 강한 남자 그런 반전 있는 남자였던 사장님, 날씨가 추운데 잘 지내시는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