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근 몇년만에 소개팅이란 것을 하게 되었다. 원체 억지로 누구를 소개 받아서 속을 알 수 있

 

는 인물도 아니고, 첫만남에 애프터를 받을 만큼 외모가 출중하지도 못한데다, 어색한 자리를 참지 못

 

하는 성격 덕분에 온갖 주접은 혼자 다 떨어서 '이상한 여자' 로 찍히기 일쑤이기에 소개팅과는 영 거리

 

가 멀다. 

 

 

원래 이번 소개팅도 거절하려다가 주선자에게 좀 빚이 있어서 거절하기도 뭣하기에 그러마..해버렸는

 

데, 아이고 이거 걱정이 태산일세. 괜히 나갔다가 엉망으로 만들어서 주선자에게 진 빚이 두배로 늘어

 

나는건 아닌가 몰라. 아잉, 몰라몰라 개복치야 어쩔꺼나 뻐끔뻐끔.

 

 

암튼 소개팅이란 것을 해본지 너무 오래되어 예전에 어떻게 했더라 기억을 되감아보니, 허참 이것

 

참 '소개팅과 나는 절대 인연없음' 을 증명하는 기억만 줄줄이 떠오른다. 아, 역시 얼굴에 갑자기 여드

 

름이 백개 나서 안되겠다고 거절해버릴까나. 

 

첫번째 소개팅은 대학교 2학년때였나? 친구의 친구를 신촌에서 만났다. 친구랑 내가 먼저 와서 아이

 

스 커피를 홀짝이고 있으려니 한껏 멋을 낸 단발머리의 소년이 검은 긴팔 자켓을 입고 나타났다. 한여

 

름이었는데, 8월이었는데. 장하다 후까시 청년. 밥을 먹고, 포켓볼을 치고, 맥주를 한잔 할 동안 그 친

 

구는 내내 땀을 흘리고 있었고, 나는 '아 그러길래 왜 한여름에 긴 자켓을, 그것도 검은 자켓을 입고 난

 

리랴' 라고 생각하며 측은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더랬다. 결국은 그러다 보는 내가 너무 더워 한마디

 

던졌다. '안덥냐?' 

 

 

후까시에 상처받은 그 청년에게 당연히 애프터는 없었다. 응. 생각하면 내가 좀 미안하지. 

 

 

두번째는 모 기업에서 보내주는 일본 탐방 프로그램에서 친해진 오빠가 자기 친구를 소개시켜 준다고

 

그래서 오케이 했다. S대생이었던 그 오빠는 매우 세련되고 유쾌하고 재밌는 사람이어서 당연히 친구

 

도 그럴 줄 알았다. 음 근데 그  친구는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워 잠근 체크 남방으로 나를 숨막히게 조여

 

왔다. 비틀즈의 광적인 팬이었던 그 사람은 비틀즈의 모든 노래를 토씨 하나 안빼놓고 모두 다 외우고

 

있었다. 오- 놀랍소. 그것도 모자라 비틀즈의 노래 가사는 참으로 절절하고 철학적이라며 읊어주기까

 

지 해서 맥주를 뿜을 뻔한 위기도 몇번 있었다. 끅끅거리며 겨우 맥주를 삼키고 벌개진 얼굴로 콜록거

 

리며 비틀즈의 시를 들었다. 내내 비틀즈의 이야기만 해대는 그 사람을 앞에 놓고 있던 몇 시간동안 비

 

틀즈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을, 다들 알랑가 모를랑가.

 

 

세번째는 누구였더라. 아, 대학교 4학년때였지. 첫번째 소개팅을 시켜준 그 친구가 다시 한번 소개시

 

켜준 사람으로 전문 여행가였다. 우선 여행가라는 직업이 매력적이어서 흔쾌히 만나고파..했던 그 사

 

람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턱수염을 기른 쬐끄만 사내였다. 이은미 콘서트 표를 내밀며 갈래

 

요? 하길래 이은미 언니의 공짜표를 놓칠 수는 없다는 일념으로 망설임 없이 쭐래쭐래 쫓아가서는 옆

 

에 있는 낯선 남자고 뭐고 다 잊고 혼자서 신나게 미친듯이 뛰어 놀았다. 특이한 성격의 그답게 그런 내

 

모습이 좋았는지 이후로 연애를 하자고 계속 졸라댔는데, 마음이 넘어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으면 안녕

 

하고 훌쩍 떠나서 아프리카니 중동이니 지중해니 싸돌아다니다 6개월 후에 돌아오고, 그럼 그 사이에

 

나는 다른 남자랑 연애하고 있고, 그게 깨지고 그 사람이 또 연애질을 걸어서 고민하면 또 남미로 훌

 

쩍 떠나서 감감 무소식...이런 패턴이 5년인가를 지속했다지 아마. 지금은 가끔 새벽에 '혹시 이미 결혼

 

했수?' 라는 문자를 난데없이 남기기도 한다. 그럼 나는 '자다가 개뼉다구 씹는 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주무쇼' 라고 답을 날린다. 뭐 그렇고 그런 친구 사이가 되었다는 얘기다. 

 

 

그 다음은...아! 의사였다 의사. 의사는 싫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이었지. 아는 언니의 친한 동

 

생의 형이라는 몇다리 건너 소개받은 이였는데 한마디로 딱 잘라 다시 한번 말하면 진짜 재수 없었다

 

니까. 모 병원 비뇨기과 레지던트라던 그치는 보는 순간부터 나를 맘에 안들어했고, 성전환 수술이 얼

 

마나 힘든지 어쩌구 저쩌구 재미없는 이야기들만 늘어놓으며 나를 은근 무시했다. 아니 니가 의사면

 

다냐. 싸가지는 어따 밥말아 먹었나, 환자 거시기 속에 넣고 꼬매버렸나. 맘에 안들면 그냥 갈 것이지,

 

훑어보면서 꼬라보면 내 키가 늘어나기라도 한다냐. 아 그래. 의사선생 눈에는 내가 기도 안찬다 그거

 

지? 쳇- 나도 재미없고 재수없는 도련님은 줘도 싫다오. 흥 쳇-

 

 

음음..어디보자 그 재수없는 레지던트 도련님 다음으로 소개팅이 너무 싫어져서 몇년을 쉬다가 재작

 

년인가 한 3년만에 소개팅을 한건 했더랬지. 회사 카피라이터 언니의 친구..로 이번에도 뭔가 멀고 먼

 

관계였지만 마왕이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에 일본음악 전문가로 등장하던 사람이었다. 방송도 몇번 들

 

어본 적 있어 흥미를 가지고 홍대에서 만났는데...역시 성우를 실제로 만나면 백퍼센트 실망한다던 녹

 

음실의 진리는 맞는 말이었다. 정작 그 사람은 다시 만나자고 계속 전화를 해왔지만 나는 계속 '야근입

 

니다' '회의중입니다' 하고 회피해버렸다. 마왕 콘서트에 가자고 조를 때는 조금 흔들렸지만서도 어쨌

 

든 별로 다시 보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마왕 콘서트는 갈 걸 그랬나?

 

 

음, 그리고 그 다음도 역시 회사 후배의 소개. 회사 후배의 친한 오빠의 친한 후배가 내 상대였다. 아

 

복잡해. 이제는 둘이 만나는 소개팅이 어색하고 싫어서 그냥 재밌게 놀자며 주선자 둘과 소개팅 남

 

녀 모두 넷이 만났다. 영화판에서 일하는 친구들이었는데, 완전 개그콤비라서 어찌나 웃었던지. 정작

 

그날 내 쪽 주선자인 후배는 술이 약해 일찍 가고 두 남자와 나는 첫날부터 새벽 세시까지 술을 마셨던

 

가 어쨌던가. 그리고 그 중간에 내 상대였던 남자애의 쌍둥이 남동생도 술자리에 합류해 데칼코마니처

 

럼 똑같이 생긴 두 남자와 남자 쪽 선배와 다같이 둥글게 둥글게 친구합시다로 마무리. 언제나 이런 식

 

이지. 그들은 홍대에서 술먹다가 술값이 떨어지면 내게 전화를 걸어 술을 사달라 조르는 화상이 되었

 

다는 소문. 아하하하 내 인생. 제길.

 

 

마지막 소개팅은 작년이었나 재작년이었나, 암튼 새언니가 만나보라고 해서 만났는데 친오빠 회사 후

 

배였다. 새언니는 어쨌든 시누이에게 좋은 남자를 소개시켜주어 시집을 보내보겠다는 의욕에 찬 시도

 

였겠으나 결과는 대 실패. 밥먹고 술먹고 얘기 나누고 그럭저럭 괜찮았네..하며 집에 들어왔는데, 나중

 

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다음 날 그 사람이 회사에 가서 '어디 참한 여자 없냐. 소개 좀 시켜주라' 라고

 

했다는...(아이고, 뒷골이야-) 것이다. 크르릉. 아니! 도대체 참한 색시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궁금

 

해 좀 알아봤더니 이전에 사귄 여자들이 모두 스튜어디스였다나 뭐라나. 아아. 고개를 끄덕끄덕. 큰 키

 

에 늘씬하고 늘 생글한 얼굴로 얌전히 웃어주는 언니들을 말하는 것이었쿠나. 그런 것이었쿠나. 그래,

 

나는 물 갖다 달라면 '손있고 발있는 니가 갖다 X먹지?' 하고, 하드고어 영화를 보며 낄낄대는 참한 것

 

과는 백만광년 떨어져있는 난쟁이 똥자루였지. 흥.

 


이상이 우습고도 지난한 나의 소개팅 역사다. 써놓고 보니 더욱 소개팅따위 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

 

이 드는데 이제와서 못한다고 할 수도 없고, 그날 잠수 탔다가 외계인에 납치되었었다고 해버리면 때

 

리겠지.

 

 

근데 가만가만 생각해보면 이 실패의 연속이었던 소개팅 역사는 내 탓도 있는 것 같다. 소개팅이란 것

 

이 왜 주선자가 그럭저럭 잘 어울리겠다 생각하는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는 것 아니더냐 말이다. 잘 알

 

지 못하는 한다리 건너의 인물을 소개받았던 경우를 빼면 다들 나와 어울리겠다 싶어 소개시켜준 것일

 

터인데..사람들이 영 헛다리 짚을 정도로 나는 나의 취향이나 성격을 가장하고 있었던 아닐까? 아니면,

 

다들 나와 관계를 끊고 싶어했다던가...(아아 이건 아니어야 하는데!) 실은 얘기가 척척 잘 통하는 사람

 

을 원하는 무지 까다로운 취향인데, 까탈스러워 보이기 싫어서 '뭐 적당한 정도면 다 괜찮아' 라고 얘기

 

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일지도. 

 

 

음. 반성합니다. 그러니까 부디 앞으로 누구를 소개시켜줄라거든 다부진 몸매의 꽃청년에 호러무비를

 

좋아하고 박민규와 하루키를 좋아하며 인디 락을 사랑하고 여행을 즐기며 기왕이면 빨갱이인 조니 뎁

 

닮은 청년으로 해주세요. 


 

응? 닥치고 계속 혼자 그렇게 있으라고? 응.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