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내게 첫사랑과 같은 사람이었다.
남자를 처음 만나본 것도 아니었는데, 마치 처음 데이트를 해보는 것 처럼
미친듯이 떨렸고, 미치도록 보고싶었고, 미칠듯이 좋아했다.
남들이 첫사랑이라 말하는 그런 감정.. 그 사람에게 가졌던 내 마음이 바로 그런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당시 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장'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사는 데 목표도 없어보였고, 사람과의 관계에도 더 이상 아무 기대가 없는 그런 사람.
그저 적당히 회사를 다니고는 있지만 아무 목표도 보람도 생각도 없이 적당히 일하다 월급만 받아오고,
친구도 하나씩 연락을 끊더니, 그저 시간 나면 가고싶었던 곳에 나를 데려가는 것만을 낙으로 삼을 뿐
그에게 그 이상의 시간은 아무것도 없는 생활을 했다.
나는 태어나서 한번도 내 꿈이 '조강지처'라는 생각을 해 본적은 없었는데,
말만 하지 않았을 뿐, 나에게도 조강지처의 컴플렉스가 있었던 것도 같다.
꿈도 목표도 계획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대충 하루를 살아가는 그 사람이,
나를 만나면서 삶의 목표도 세우고, 미래를 계획해가며 건실하게 사는 그런 새 사람이 되길 바랐다.
그저 내가 옆에서 지켜주고 믿고 따라주면 그 사람은 그렇게 변할 수 있다 믿었다.
그런 마음 하나로, 나를 힘들게 할때나 상처를 줄때도 한결같이 그 사람의 옆자리를 지켰다.
나보다 몇년씩 더 살아본 사람들, 남자를 많이 만나본 사람들, 친구들,
모두가 나에게 조언하기를 '그런 사람 그만 만나고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지내라' 했다.
사연 없는 커플이 어디 있겠냐만은,
우리는 유난히도 많이 울고 다투고 상처를 주고받는 커플이었기에
'연애'라는 핑계로 끝없이 울다 스스로 마음 추스리는 과정을 되풀이 하는 내가 한심히도 보였을게다.
쉬이 변하지 않는 게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 변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저 변할 필요가 없는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들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철없고 어렸던 내 청춘의 몇년을 그 사람에게 바치다시피 그와 함께 보내고 나니,
차마 눈치를 채기도 전에 어느덧 그 사람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회사를 옮기더니, 과거엔 생전 하지않던 일 이야기를 하며 눈을 반짝거리는가 하면
시큰둥히 연락을 끊었던 자기 친구들과도 다시 잘 지내는 듯 하고
무뚝뚝하게 굴던 자기 식구들에게 선물도 하고 용돈도 쥐어드려가며
누가봐도 '건실한' 총각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꼬박꼬박 월급도 모으더니 어느새 차도 좋은 차로 바꾸고,
잘 사는 집 자식도 아닌데 어떻게 돈을 모았는지 일산에 아파트도 한채 마련했다.
그 쯤 되니 나도 어느새 결혼 적령기가 되어있었고,
당연한 수순으로 그는 나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어쩌면 그를 만나왔던 그 몇년의 시간동안 나는 그런 결과를 기다리며 참았던 것도 같다.
허나 참 이상하게도,
막상 상황이 그렇게까지 오고 나니, 나는 그제서야 지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참 미련하게도
내가 아니면 아무도 그 사람을 이렇게 붙잡아주지 못할거라는 말도 안되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연애라기보다는 자식을 키우는 심정이었던 걸까.
그를 보며 '이제 이 쯤 되면 다른 여자에게 청혼을 해도 무시당하지는 않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이젠 그 사람을 놔줘도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난 그 사람과 헤어졌고,
그는 그 후 근 일년을 나에게 매달렸다.
헤어지고 나면 느끼는 거지만,
만나는 동안 그 연인에게 최선을 다 했다 생각하면 오히려 미련이 덜 남는 듯 하다.
오히려 그렇지 못한 사람이 그간 준 상처와 못해준 일들을 떠올리며 평생 후회하고 미련을 가질 뿐.
그도 그랬나보다.
이제야 자리도 잡히고 너에게 정말 잘 해 줄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와서 자기를 버리면 그동안 내게 준 상처와 빚을 자기는 무슨 수로 갚냐며
제발 기회를 달라며 울고 불고 매달리고 빌었다.
하지만 그 사람을 계속 만나는 한,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서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을 단호히 접었다.
그런 몇달사이 나는 남들이 말하는 소위 '좋은 사람'과 만남을 시작했다.
더 바랄 게 없이 그저 나에게 잘 해주고 항상 노력해주는 그런 사람.
그런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을 만나 지극히 평범한 연애를 했다.
그 와중에도 그 사람은 끝없이 연락을 해 오고, 빌고, 설득하고 또 때로는 고집도 부려봤으나,
더 이상 이도 저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는 하물며 '세컨'이나 '보험'마저 자처했다.
그저 얼굴만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같이 웃으면서 대화라도 나눌 수 있게 해달라고..
그게, 잘해주지 못한 사람이 가지는 미련인건가보다 싶었다.
그래도 매몰차게 잘라내고 나니 이젠 연락도 완전히 끊겼다.
이제는 잘 살겠지.
다른 여자 만나서 그 사람이 차곡차곡 준비해오던 그런 결혼도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내 마음도 퍽 차분해졌다.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이별이란 걸 한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연락이 끊기고 나서야 내 악몽이 시작됐다.
밤마다 그 사람이 꿈에 나와 나를 괴롭힌다.
한번은 울며 매달리고
한번은 웃으며 나를 달래고
또 어떤 날은 날 찾아와 다 때려 부수며 협박하는 꿈까지.
매일 다른 레파토리로 꿈에 나와 나를 힘들게 한다.
처음엔 그저 '연애'란 걸 한 사람들은 다 겪게되는 힘든 과정중에 하나려니 했다.
그 사람을 만나 행복한 시간이 있었다면, 그래, 이 쯤 되는 고통도 그저 내가 다 감내해야 하려니 했다.
하지만 그렇게 몇달 째 악몽에 시달리고 나니
내가 한 사람을 좋아했던 게 이렇게까지 고생해야 하는 일이었나 하는 회의감마저 들기 시작한다.
헤어진지 일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렇게 긴 시간동안 내가 힘든 마음을 참아내야 할 만큼
사람이 사람을 좋아했던 일이 용서받기 힘든 과거가 되는걸까.
며칠전에는 문자가 왔다.
아무렇지 않게 또 '한번만 만나달라'는 문자.
회신은 하지 않았고,
예상대로 그 사람도 다시 연락을 하며 매달리지는 않았다.
그리곤 그 날 밤에도 어김없이 꿈에서 그 사람을 마주치곤, 날 다그치는 그를 보며 밤새 울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시달려야 하는걸까.
이젠 누구도 날 괴롭히는 게 아닌데, 내 스스로 이렇게 나를 괴롭히고 있다.
누굴 탓 할수도 원망을 할 수도 없이 그저 내가 감당해내야 할 과정인건데,
도대체 이 과정이 언제 끝날지..
누굴 만나고 헤어짐이 꼭 이렇게 힘들어야만 한다면 정말 다시는 하고싶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