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러가도 돼?"
 
언제나처럼 뜬금없이 전화가 왔다.
 
그리고 삼십 분쯤 뒤에 살짝 취한 그녀가 우리 집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우리 한 달만에 보는건가?"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니? 서로 사는 게 바쁘다보니..."
 
집에 있는 와인을 따고 보쌈김치를 안주삼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예쁘장한 여자치고는 꽤나 재미있는 대화 상대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애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구도 아닌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화제가 어느 쪽으로 흘러가도 결국에는 별로 좋지 않은 뒤끝을 남긴다.
 
"우리 이제 만나지 말까?"
 
처음보다는 많이 시들해진 섹스 뒤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신기하게도 언제나 먼저 그만두자고 하는 쪽은 여자다.
 
어쩌면 떠보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굳이 이유를 묻지 않고 그래 만나지 말자 하고 대답해줬다.
 
그녀는 울지 않았고, 조금 실망한 표정 같기도 했지만 나의 착각일 수도 있다.
 
요즘들어 그녀에게 대쉬한다는 그 '괜찮은 남자' 랑 제대로 사귀기로 한걸까?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쓸데없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녀도 이제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니까,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싶다' 며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대사로 고백했다는 그 남자한테 마음이 가기도 할테지.
 
"와인이랑 보쌈김치랑 먹으니까 맛있더라."
 
그렇지만 맥주와 통닭처럼 천생연분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피자와 콜라처럼 모두가 공인하는 사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아마 다음 번에 와인을 마실 때는 보쌈김치가 아닌 다른 안주와 함께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녀는 데려다 주겠다는 것도 마다하고, 그러면 택시 타는 거라도 보겠다는 나를
 
억지로 현관에서 떼어버리고 종종걸음으로 떠나갔다.
 
일 년 가까이 알고지낸 사이치고는 참 싱거운 이별이다.
 
이런 것도 이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뒷정리를 하면서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나랑 자는 여자들은 나랑 사귀고 싶어하지 않을까?
 
물론 나도 사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사귀고 싶지 않다' 는 말을 대놓고 하는 것도 아닌데.
 
가끔 친구들이 여자랑 자고나서 발목 잡힐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면...
 
꼭 나이트나 술집에서 만난 사이 뿐 아니라 소개팅을 하거나 원래 알던 여자들도
 
나랑 섹스는 해도 사귀지는 않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다른 남자 이야기며 결혼 계획 등을 스스럼 없이 이야기하는 게 신기하다.
 
그래서 얼마 전에, 나이 차이로는 조카뻘에 가까운 학교 후배가
 
'오빠는 여자들한테 인기 많죠?' 하고 물었을 때도
 
우습지만 정말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아쉬울 때는 별로 없지만 이런 걸 인기가 많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감미롭고 향기나는 와인같은 그녀들에게 취하지만
 
결국에는 가끔 곁들이면 색다른 보쌈김치의 포지션일 뿐인데.
 
섹스는 하지만 데이트는 하지 않고
 
깊은 정이 들만큼 자주 만나거나 연락하지도 않는다...
 
이 나이쯤 먹으면, 정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피차 잘 아니까.
 
언제라도 정리할 수 있는 그 정도의 관계로만, 알아서 유지하는 거다.
 
 
나에게도 한때는 사귀는 사람이 있었다.
 
박진영의 '니가 사는 그집' 이라는 노래의 찌질한 가사처럼
 
아직도 예전 그 친구의 소식을 궁금해하고 주변 사람들의 홈피를 기웃거리며
 
아기자기한 신혼생활을 훔쳐보는 내 모습이 새삼 초라하고 한심하다.
 
세상에 사랑이 정말 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건 확실히 존재한다.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정은 어찌합니까?"
 
스승이 제자에게 답했다. "...그것은 답이 없느니라."
 
 
 

-_- : 볼글... (2008/01/10 03:35) 글삭제
-_- : 요즘 괜찮은 글들 많네 (2008/01/10 03:52) 글삭제
-_- : 여자랑 사귀지 못하는 당연한 이유는 확신을 주지 못하니까 그런거죠.
그 남자랑 죽어도 사귀기 싫은 여자도 남자의 사귀자는 애정공세에 무너져서 사귀게 되는데
위에 상황에서 남자가 사귀자는 말을 단호하게 하지 않는 이상에야...왠만한 여자들은 저런 행동을 하지 않을까요?
(2008/01/10 04:02) 글삭제
이어서 : 사귀고 싶으면 현관에서 억지로 떼어보내는 여자를 와락 붙잡고 너 없으면 안돼 우리 사귀자
라고 해보슈;
그럼 10에 7~8명은 사귀게 될겁니다 아마;
(2008/01/10 04:03) 글삭제
-_- : 여러번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08/01/10 04:42) 글삭제
-_- : 터져나오는 수작 무낙;들에 이거 뻘글을 쓸 수가 없네 그려;; (2008/01/10 04:48) 글삭제
-_- : 다정한? 상냥한? 그런 모습에 확신을 많이 갖는것 같아요 여자는..제 경험으론; (2008/01/10 09:41) 글삭제
-_- : 후술!! 여친생각하면서 함 써바;; 후기도 쓰고;; (2008/01/10 10:48) 글삭제
- _- : 함 써바가 함 씨바; 로 보이는건 나뿐이냐; (2008/01/10 10:53) 글삭제
-_- : 글쓴부터가 별로 사귀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왜 글쓴과 잔 여자들은 나와 사귀고 싶어하지 않을까라니..정말 이유를 모르는건가요? 남자가 봐도 너무 확신을 안주는 행동만 하시는거 같은데요..이제껏 진짜 연애를 해본적이 없으신걸지도..-_-;;  (2008/01/10 11:33) 글삭제
-_- : 이런씨발 그놈의 확신. (2008/01/10 11:36) 글삭제
-_- : 씨발놈의 확신이라니;; 확신 안주는 여자 못만나보셨나-_-;; 남자나 여자나 서로 못믿으면 어떻게 사귀나요 (2008/01/10 11:48) 글삭제
-_- : 그냥 마음에 안드는 점을 확실하게 말 못하고 핑계삼아 잘 하는 말이 "그놈의 확신" 이기 때문이죠.. (2008/01/10 12:03) 글삭제
1148 : 아..예 저는 확신 안주는 여자한테 한 6개월간 질질 끌려다녀본 적이 있어서..-_-;;; (2008/01/10 12:09) 글삭제
-_- : 그것은 답이 없느니라. (2008/01/10 12:30) 글삭제
to 1203 : 왜 싫은지 설명할 수 없지만 왠지 싫을 때 하는 말이 "넌 안돼, 확신이 안서"라면, 반대로 왜 좋은지 설명할 수 없지만 그래도 좋을 때 하는 말이 "사랑해, 너 밖에 없어"야. 확신이 안선다는 말은 듣는 이 입장에서는 핑계같고 억울할지 몰라도, 하는 이 입장에서는 사랑의 느낌만큼이나 결정적이지. (2008/01/10 14:11) 글삭제
-_- : 많은 여자들은 감을 믿고, 글쓴과 사귀기를 원하지 않았던 대부분의 여자들은 아마 그네들의 감이 말해준 "저 남자는 너랑 그다지 사귀고 싶어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믿었을 거야. 실제로 글쓴도 그렇게 인정했잖아. (2008/01/10 14:18) 글삭제
1148 : 쩝...하지만 뻘여자랑 섹스하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2008/01/10 21:52) 글삭제
-_- : 피자에 콜라라니;; 피자에는 맥주입니다. ㅎㅎ...피자에 맥주 맛을 들이면 다른것이랑은 먹기가 힘든데.. (2008/01/10 23:22) 글삭제
-_- : 이사람.. 부럽다; ㅠ.ㅠ (2008/01/11 02:01) 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