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몸의 솜털은 체온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고
코털은 코에 들어가는 먼지를 거르기 위한 것이며
음모는 중요 부위를 보호하고 성감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배웠다.
생물 선생님 가라사대, 인체의 모든 기관은 다 쓰임새가 있어 존재하는 것이니라.
그래서 선생님은 한여름에도 한 줌의 겨드랑이 털을 소중히 간직하고 계셨던 것인가요.
여자라고 제모를 꼭 해야한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민소매 입고 필기하실 때는 저희가 좀 무안했어요.
선생님이 탕웨이도 아니잖아요.
미국 어학연수 시절에 동양 여자애들에게 추근덕거리기로 유명했던 터키 남자애가 나에게 말했다.
"킴, 한국 여자애들은 참 예쁜데 말이야. 이상하게 거기 털을 정리 안해. 거기가 정글이야."
너무 놀라버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소녀시대의 소녀시대.ver)
다른 나라 여자애들에게 물었더니 "오우 킴, 털 정리는 매너야."랬다.
졸지에 매너 없는 여자가 된 나는 즉시 마트에서 면도기를 사 비키니 라인을 밀어보았다.
확실히 시원하고 좋았다. 그러나 1주일 후 털이 자라면서부터 나는 후회하기 시작한다.
까실한 거기카락이 내 허벅지를 자극했고, 꿀벅지를 넘어 꿀단지 수준의 육덕진 내 허벅지는 아프고 따갑고 가려웠다.
예전에 여자 목욕탕에서 다리 벌리고 드라이어기로 수북한 털을 말리는 아줌마를 보며 왜 저럴까 눈살 찌푸렸는데,
남 몰래 거기를 긁는 내 신세가 더 하찮았다.
아무튼 여름이 다가오는데 캐리비안베이도 오션월드도 갈 일 없건만,
거기카락을 제거하면 질염 예방에도 좋고 생리 때도 편하며 남자친구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즉시 지마켓에서 제모 왁스를 검색했다.
거기에는 이미 많은 구매자들의 후기가 있었다. 나만 빼고 모두들 하고 있었던 것인가.
나는 친구들에게 메신저로 물었다. '너도 거기 털 정리하니?'
친구들은 '야, 겨드랑이 털 뽑는 것도 힘든데 거기까지 정리하란 말이냐.
니가 그 풍조에 동참해서 그게 당연하게 되어버리면 안돼.'라며 나를 말렸다.
모두 같이 망해보자는 훈훈한 우정에 자극을 받아 남몰래 왁스를 주문했다.
친구여, 미안하다. 나는 흥할테다.
왁싱을 전문으로 하는 샵도 있다지만, 나도 제대로 안 본 곳을 다른 여인에게 보여준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어서 셀프를 결심했다.
누워서 발바닥을 붙인 굴욕적인 자세로 소리를 질러야한다는 게 좀 그랬더랬다.
설명서에는 거기카락을 1센티 정도로 남기고 자르라고 써있었다.
나는 문구용 가위를 알콜로 소독한 후 잘라나가기 시작했다.
삼십년이 다 되도록 내 영희를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이 기회에 안면을 제대로 텄다.
그리고 전용 왁스를 전자렌지에서 돌린 후 카라멜처럼 꾸덕한 농도로 만들어 거기카락에 발랐다. 굳기를 기다렸다.
1분이 지나자 왁스가 굳고, 나는 떨면서 떼냈다.
나도 울고 영희도 울었다.
국민학교 수련회 때부터 회사 다니며 사회의 쓴 맛을 보는 여태까지 '극기'라는 두 글자를 지겹도록 들은 것 같은데,
지금처럼 내가 나를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처음이었다.
어떻게하든 욕이 나오게 아픈 건 똑같은데 살살하면 더 아프다.
그래서 과감히 확 떼야하는데 또 내가 나에게 잔인해지기는 힘들다.
원래 자기와의 싸움이란 이기는 것도 나고 지는 것도 나니까 좀 져도 되는거잖는가.
스파르타쿠스에 나오는 남자들은 털 한 올 없이 깨끗하던데,
이건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검투사니까 가능했던거다.
하지만 반쯤 떼냈는데 반 남기면 더 이상하잖아.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왁스를 바른 후에 떼냈다.
나의 거기카락 한 올 한 올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나를 붙잡는다.
시뻘개진 나의 사타구니를 보며 대학교 교양 수업시간에 본 스탈린그라드를 떠올렸다.
그리고 치열했던 싸움 속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생존자를 쪽집게로 확인 사살했다.
거사를 치른 후에 나는 하반신 탈의로 바닥에 널부러져서 고민했다.
도대체 거기카락은 왜 거기 있는 것인가.